징- 징-
요란하게 울리는 진동소리에 잠이 깬 유나는 실눈을 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 반, 이 시간에 전화를 하다니 도대체... 발신인을 확인한 유나는 짜증을 억누르고 잔뜩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왜.”
“뭐야, 오랜만에 하는 인사가 왜 그래?”
“이 시간에 전화 건 사람이 되게 당당하네.”
“프로젝트 끝났다면서, 왜 연락을 안 해?”
“술 마셨으면 얼른 들어가서 자.”
“나 지금 집 가면 맞아 죽어.”
“그건 네 사정이고.”
“최유나 못 본 사이 엄청 야박해졌어.”
“…”
“나 너네 사무실 가는 길이야. 10분이면 도착할듯?”
“뭐라고?”
“편의점 들렀다 갈 거니까 먹고 싶은 거나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메시지 남겨. 이따 봐!”
전화를 거는 것도, 끊는 것도 제멋대로인 상대방 때문에 유나는 머리가 아팠다. 한 달 만에 연락을 하는 주제에 지금 쳐들어오는 중이라니, 제멋대로인 것도 정도껏이지. 아직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꾹꾹 누르며 몸을 겨우 일으켰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불빛에 사무실 전체가 겨우 조금 보일 정도의 칠흑 같은 새벽이었다. 텅 빈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찾아 겨우 목을 축이고 눈에 보이는 옷가지들을 대충 옷장에 쑤셔 넣었다. 선전포고를 날린 상대는 가끔 아무 의지도 없는 것 같다가도 뭔가를 하겠다고 결심하면 어떻게든 하고야 마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마도 곧 문 앞에 등장하고야 말 것이다.
다행히 며칠 전 모 대기업에서 따냈던 대형 프로젝트를 마치고 대대적으로 청소를 하고 난 뒤라 사무실 겸 집으로 쓰고 있는 오피스텔은 꽤 말끔한 상태였다. 아마 그 사람도 이미 누군가로부터 그런 사실을 듣고 찾아오는 거겠지. 제멋대로 굴다가도 유나가 바쁘거나 예민해져 있을 때는 절대 먼저 건드는 법이 없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은비는.
유나는 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가만히 떠올리다가 책상에 놓여 있는 홀더를 집어 들었다. 제도판에 새로 깔아둔 종이 위로 슬슬 손을 움직여 선을 그었다. 손을 쓰는 것은 오랜만이라 처음에는 조금 엇나갔지만 곧 하얀 종이에 까만 선들이 나란히 펼쳐졌다.
평행선 같은 사람. 정은비는 최유나에게, 그리고 아마도 최유나도 정은비에게 그런 존재겠지. 두 사람을 설명하는 단어는 많았다. 고등학교 동창. 오래된 친구. 가장 가까운 사이. 어떤 사람은 최유나에게서 정은비를 보고, 정은비에게서 최유나를 본다고 했다. 하지만 옆에서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서로 끌어당겼다 놓기를 반복했다.
누가 먼저 이 관계에 불을 당겼는지 그런 건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아직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접점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뿐. 어느 순간에는 저쪽이 제게 기대오는가 싶다가도 도로 꼿꼿해지고, 또 어느 순간에는 제가 저쪽으로 기울어지나 싶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둘 사이의 거리는 항상 그대로였다. 수학적 정의로서의 평행. 인간이 긋는 이 선은 결국 무한으로 확장하다 보면 언젠가는 닿고야 말 텐데, 너와 나는 어느 쪽일까. 종이 한 장이 금방 선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전자도어락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밤늦게 남의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제 집에 드나드는 것 같이 태연하게 구는 은비 때문에 헛웃음이 났다.
“너네 집이야, 여기가?”
“혹시 몰라서 눌러봤는데 열리던데?”
“..말이나 못하면.”
“와, 되게 오랜만이다 제도판 앞에 서 있는 최유나. 건축사 딸 때 맨날 내가 옆에서 심 깎아주고 그랬는데.”
“언제적 얘기를 하고 있어.”
“자, 네가 좋아하는 기네스, 이건 내 거.”
집주인이 환대가 아니라 냉담한 반응을 보여도 상관 없다는 듯 은비는 편의점 비닐봉지에서 캔맥주와 안줏거리를 꺼내들고 익숙하게 탁자에 풀어놓았다. 냉장고를 열고 제가 사온 것을 채워 넣으며 쏟아내는 잔소리도 이미 유나가 레퍼토리를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또, 또, 이렇게 비어있는 거 봐. 너는 건물 짓는다는 애가,”
“자기 삶 하나 제대로 지탱 못하는 사람을 뭘 믿고 자기 건물을 맡기겠냐고, 네, 네, 알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잔소리 듣기 싫다 이거지? 흥, 나도 아무한테나 이런 소리 해주는 사람 아니야.”
“알아.”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온 은비가 유나의 맞은편에 턱을 괴고 앉았다. 아까는 패딩을 입고 있어 몰랐는데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검은색 원피스가 안 그래도 작은 은비의 몸을 더 작아 보이게 했다. 유나는 하얗게 드러난 어깨선과 쇄골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제가 입고 있던 후드 집업을 벗어 은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왜, 다들 이 옷 예쁘다던데.”
“어디 가서 그렇게 앉지 마. 다 보여.”
“어머, 다 보라고 이렇게 앉은 건데?”
“너 또 헤어졌구나.”
“아, 최유나 진짜 별로야.”
핀잔을 주어도 오히려 야살스럽게 웃으며 더 어깨를 내밀고 보란 듯이 저를 올려다보며 장난을 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말에는 도리어 금방 울상이 되어버리는 정은비를 아직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이렇게 불쑥 찾아와 술을 마시자는 정은비를 볼 때마다 저런 표정을 짓고 싶은 건 이쪽인데 말이지.
“그래도 이번엔 좀 오래 갔네. 6개월?”
“몰라, 한 5달 정도 됐으려나.”
“이번이 몇 번째더라?”
“그런 걸 왜 세.”
“참 나, 그럼 그럴 때마다 찾아오지나 말든가.”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마지막 말을 꺼낼 때 울컥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유나는 곧 힘없이 웃는 은비를 보며 짜증스럽게 말을 뱉은 걸 후회했다.
저도, 지금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는 정은비도, 용기가 없을 뿐이었다. 일에 한번 빠지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하고 집중하는 최유나와 누구에게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정은비는 너무나도 위태로울 테니까. 접점을 만들고 영원히 어긋나 버리는 관계가 되느니 이렇게라도 계속 보고 싶다는 게 우리의 욕심이니까.
“근데 정말 제도판 보니까 옛날 생각 난다.”
“그렇지, 아무래도 요샌 손으로 안 그리니까.”
“너 건축사 땄을 때 내가 부탁한 거 기억해?”
“무슨 부탁?”
“나중에 내가 살 집은 유나 네가 지어달라고 했잖아.”
“그랬나?”
“그랬나가 뭐냐, 치사하게. 진짜 까먹은 거야?”
“..이리 와.”
유나는 남은 맥주를 모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컴퓨터와 빔프로젝터의 전원을 차례로 켜는데 오늘따라 취기가 빨리 오르는지 속이 타는 느낌이었다. 몇 번의 헛손질 후에야 빈 벽을 가득 채운 도면에 은비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 이거 네가 작업한 거야? 나 여기 살고 싶어.”
그렇겠지, 당연히. 10년 동안 정은비가 하는 말 하나하나 기억해두었다가 재현한 곳인데. 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2층집, 하루종일 누워 창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커다란 창문을 두어 채광 좋은 거실, 재료를 잔뜩 늘어놓고 요리를 할 수 있게 넓은 부엌, 그리고 커다란 침대와 캐노피를 두고 싶다고 한 안방까지. 하지만 이내 유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너 지어준대?"
"그럼 누구 지어줄 건데?"
"내가 들어가서 살 거다, 왜."
"그럼 나도 같이 살면 되겠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치, 나 들켰어?"
"..자자, 피곤하다."
"그럴까? 그럼 나 먼저 씻을래!"
유나는 익숙하게 잠옷을 찾아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은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아주 제 집인 줄 알지, 진짜. 이번에야말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꿔놓아야지. 아니, 이번에도 바꾸지 못하겠지.
언제나 내것이면서도 내것이 아니었던 사람. 나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저 집에서 너랑 나랑 함께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쯤 닿을 수 있을까, 은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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