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윶읂(구칠즈)/단편

겨울, 눈

 

 

 

 

 

 

 게스트하우스의 아침은 언제나 바빴다. 특히 요즘처럼 눈발이 휘날리는 때에는 마당뿐 아니라 길목까지 구석구석 쓸어내고 수도가 얼지 않도록 수시로 확인하는 게 일이었다. 추위라면 질색인 은비가 겨우 창문을 열고 모든 방 청소를 끝낼 쯤이 되면 해가 중천에 떴다. 게다가 손님이라도 있는 날이면 사람을 맞고 보내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놀랍게도 이 나라에서 춥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이곳에 굳이 이맘때쯤 찾아오는 괴짜들이 가끔 있는 법이었다. 그래도 매일 따뜻하게 데운 코코아를 마시며 다락방 창문으로 쏟아지는 겨울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기나긴 밤을 그럭저럭 보낼 만하게 해주었다.

 

 

 

 

 

 

그날은 유독 추웠다. 시작과 끝을 모를 겨울 중에서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을 정도였다. 뉴스에서는 계속 동장군의 세가 대단하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개울이 얼어붙었다거나 폭설로 길이 막혔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 지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 덕에 오전부터 쌓인 눈이 녹지 않고 온통 피어났지만, 이런 추위에는 설경 놀이꾼들도 마을을 찾지 않았다. 이따금 눈이 내려앉는 고요한 공기 사이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는 나뭇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양철 주전자를 난로 위에 얹어둔 은비는 패딩으로 온몸을 감싸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이제 겨우 3개월이 된 진돗개 감자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춥지? 오늘은 손님도 없는데 누나랑 들어가서 자자. 대신 조용히 해야 돼, 알았지?”

 

 

 

 

 

 

 꼬리를 팔락거리던 감자가 은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컹컹 짖기 시작했다. 쉿, 하고 안아 들어도 잔뜩 흥분한 강아지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이런 애가 아닌데. 의아해진 은비가 고개를 들자 저 멀리서 다가오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하늘 탓에 흐릿하기는 해도 분명 인영이었다.

 

 

 

 

 

 손님인가?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분명 오늘 달력은 비어있었다. 애초에 이런 추위에 여기까지 찾아오는 외지인은 없었다. 하지만 이 밤에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눈길을 헤쳐가며 걸어 다닐 마을 사람도 있을 리 없었다. 은비는 조금씩 커지는 그 형체를 눈으로 좇았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아 눈이 소복한 길에 발자국이 또렷이 남았다. 최소 귀신은 아니겠네, 조금 우스웠지만 은비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낯선 이는 자기가 사람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게스트하우스의 문을 조금 세게 두드렸다.

 

 

 

 

 

 

 

 

“계세요?”

“누구시죠?”

“최유나입니다. 예린 언니 소개로 왔는데요.”

 

 

 

 

 

 

 

 

 예린 언니..? 은비는 그 이름을 듣고서야 어렴풋한 기억 하나를 끄집어 냈다. 지난주의 일이었다.

 

 

 

 

 

 

 ‘은비야, 너네 게스트하우스에 방 좀 있어?’

 ‘네, 언니 오려구요?’

 ‘아니, 나 말고, 아는 동생.’

 ‘얼마나 있을 건데요?’

 ‘한 몇 주 정도? 숙박비 같은 건 걱정하지 마. 걔 잘 나가는 사진작가거든.’

 ‘그럼 호텔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걔가 그런 스타일이 아니어서.. 나도 너한테 부탁하는 게 훨씬 마음 편할 것 같아서 그래.’

 

 

 

 

 

 

 

 

 예린은 몇 번이나 잘 좀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하며 전화를 끊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예린의 부탁이다 보니 순순히 알겠다고는 했는데, 그러고 보니 찾아오는 이의 이름도, 일정도 묻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날, 이 시간에 올 줄 알았으면 내일 오라고 귀띔이라도 해줬을 텐데. 은비는 굳게 잠긴 빗장을 서둘러 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리며 문이 열리자 코 끝이 온통 빨간 여자가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을 털다가 일순간 정지했다. 까만 밤하늘, 하얀 눈, 그리고 그 눈에 반사된 달빛이 유나의 얼굴을 비추었다. 잠깐 세상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흩날리던 눈송이 하나가 유나의 코에 내려앉았다가 녹아 내렸다. 오직 그 물방울만이 얼어붙은 시간을 흐르게 했다.

 

 

 

 

 

 

 

 

 

“저.. 들어가도 될까요?”

“아, 그, 그럼요! 들어오세요!!”

 

 

 

 

 

 

 

 

 조심스럽게 입을 연 유나의 질문에 은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무 추워서 사고회로가 정지한 모양이었다. 제 체구만큼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유나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잠시 고민하던 은비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 방 열쇠를 유나에게 건넸다. 보통 2인실로 내주던 방이었다.

 

 

 

 

 

 

 

“201호에요. 화장실이랑 샤워실 다 안에 있고 계단 바로 옆이라서 편하실 거에요.”

“감사합니다.”

“조식은 무료로 드리는데 사실 별건 없어요. 빵이랑 뭐 그런 거죠. 커피랑 차는 언제든지 마음대로 드셔도 되고.. 아! 술은 반입 금지에요. 마을 어르신들이 취객은 질색하셔서.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나가고 들어오는 시간 같은 건 상관 없나요?”

“네?”

“그게 제일 중요해서요.”

“딱히 정해놓진 않았는데.. 그래도 저 혼자 하는 곳이니까 너무 밤 늦게 오지는 말아주세요.”

 

 

 

 

 

 

 

 

 급조된 규칙에 만족했는지 유나가 환하게 웃었다. 아직 잔뜩 얼어붙어 있던 얼굴에서 그제서야 한기가 조금 가시는 느낌이었다. 다시 짐을 짊어지고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는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유나가 멈추어 섰다. 피할 새도 없이 뒤돌아서는 유나의 눈과 은비의 눈이 마주쳤다.

 

 

 

 

 

 

 

 

“어.. 뭐 필요하신 거라도..?”

“아직 이름을 못 들은 것 같아서요.”

“네? 아, 저, 정은비라고 해요.”

“은비 씨가 안고 있는 강아지는요?”

“감자요!”

 

 

 

 

 

 

 

 유나는 감자, 감자, 하고 두어 번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튿날부터 유나의 게스트하우스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실 생활, 또는 무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애매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빵, 시리얼, 우유 등이 전부인 조식을 먹고 나면 문을 나서고 해가 지고 나서야 들어오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예린에게 사진 작가라고 듣기는 했지만 막상 유나가 카메라를 들고 나서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밤마다 틀어박혀 작업을 하는 건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방을 정돈하러 들어갈 때마다 항상 그 전날과 다를 게 없어서 그 가설도 기각되었다.

 

 

 

 

 

 

 

 

 

“은비 씨, 택배 왔어요!”

“아, 감사해요!”

“그 아가씨는 어디 있어요?”

“누구요?”

 “그.. 왜 있잖아요, 며칠째 여기 사는 사람. 아까 보니까 이장님 댁에서 편지 읽어드리고 있던데?”

 

 

 

 

 

 

 

 

 그나마 유나의 행적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실마리는 가끔 동네 사람들이 들려주는 목격담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제는 시장에서 군밤 장수 옆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더니, 오늘은 이장님 댁에, 내일은 마을 뒷산에 있다는 식이어서 은비의 의아함은 점점 커질 뿐이었다. 아침이면 어김 없이 마주 앉아 빵에 버터를 바르고 있는 유나에게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손님의 사생활에 대해 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우유와 함께 질문을 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물음표가 길어지면서 까맣고 단조로웠던 겨울밤은 유나에 대한 생각과 질문으로 조금씩 번져나갔다.

 

 

 

 

 

 

 그렇게 조금씩 낮과 밤을 채우던 호기심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살을 에던 추위가 조금 가시고 드디어 마당에 따뜻한 햇볕이 들던 날이었다. 추위를 핑계로 미뤄두었던 이불 빨래를 하려고 커다란 고무통을 질질 끌고 오는 은비는 나갈 채비를 마친 유나와 마주쳤다. 제 키만한 통을 겨우 끌고 다니는 은비를 발견한 유나가 달려들어 힘을 보탰다.

 

 

 

 

 

 

 

“이거 여기 내려놓으면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진짜 무거웠는데.”

“이불 빨래 하시려는 거면 도와드릴게요.”

“아니에요! 유나 씨 바쁘실 텐데..”

“저 하는 일 없어요, 같이 해요.”

“그래도.. 죄송한데..”

“그럼, 같이 하는 대신에 저랑 점심 먹어주세요. 오늘 아무 계획 없었거든요.”

 

 

 

 

 

 

 

 

 확실히, 혼자보단 둘이 편한 노동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 서서 좋아하는 음식이나 학창 시절 싫어했던 과목 같은 얘기를 하며 이불을 밟았다.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처럼 대화 주제가 여기서 저기로 자연스럽게 흘러 힘든 줄을 몰랐다. 게다가 키가 커다란 유나 덕분에 빨랫줄에 이불을 너는 것도 이전보다 한결 수월했다. 은비는 고맙다는 의미로 점심을 차려냈다. 손님에게 밥상을 차려준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빵이나 시리얼을 제외하면 손님과 일대일로 마주앉아 밥을 먹은 것도 처음이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다행이에요. 누구한테 요리해 준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걱정했는데.”

“이렇게까지 해줄 줄 알았으면 혼자 다 할걸 그랬어요.”

“손님한테 빨래 시킨 제가 더 고맙죠.”

“아니에요, 은비 씨 도와드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또 할 일 있으면 말해주세요.”

“요즘 바쁘시지 않으세요?”

“아니요, 전혀요.”

“사진은 안 찍으시나 봐요?”

 

 

 

 

 

 

 

 

은비는 오랫동안 참아온 것 치고는 제법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진 제 자신이 기특했다. 배가 고팠는지 밥을 한 숟갈 가득 입에 넣던 유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예린 언니가 말했겠구나.”

“비밀인 거면 미안해요.”

“은비 씨한테 숨기려던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말한 적이 있었나, 기억이 안 나서.”

“언니가 유나 씨 잘 나가는 사진 작가라고 하던데.”

“그냥 사진 찍는 사람 중 한 명이죠.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는 아직 한 장도 안 찍었네요.”

“왜요?”

“눈에 담는 게 먼저라서요. 좋아하지 않으면 찍을 수 없어요. 명색이 작가라는 사람이, 좀 웃기죠?”

 

 

 

 

 

 

 

 

 유나는 웃고 있었지만 그게 농담이 아니라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유나의 말투가 다른 사람에 비해 차분하고 다정한 편이긴 하지만 유독 더 무게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은비는 잠시 숨을 고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혀요. 그런 은비의 반응에 이번에는 유나가 놀랐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채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까만 눈을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은비 쪽이었다. 요즘 유나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했더니 머리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았다.

 

 

 

 

 

 

 

 

“유나 씨는 애인 없으세요? 이장님이 유나 씨 엄청 탐내시던데.”

“그래요? 저한텐 그런 말씀 안 하시던데.”

“이장님이 원래 사람 칭찬을 뒤에서 하는 스타일이시거든요.”

“은비 씨는요?”

“저요? 저는 앞에서 하는 스타일,”

“아니요, 은비 씨 애인 있으시냐구요.”

 

 

 

 

 

 

 

 

 자기가 한 질문을 역으로 돌려받았을 뿐인데 은비는 숨이 턱 막혔다. 아무래도 제 무덤을 판 기분이었다. 웃으면서 없다고 하면 되는데, 그 동안 수많은 손님들에게 했던 대답인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아마 누구든 유나의 눈동자를 한참 바라보다 보면 머릿속이 어지러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물을 두어 모금 삼키고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저는 혼자가 편해요. 누가 여기까지 와서 같이 일을 하겠어요.”

“떠날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네, 전 여기가 좋아요.”

“혼자 있으면 심심하거나 무섭지 않아요?” 

“감자도 있고, 마을 어르신들도 있고, 이렇게 유나 씨도 있잖아요.”

“..그러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두 사람은 그 대화에 대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 이후 유나는 게스트하우스에 좀 더 오래 머물렀다. 다른 손님들이 먹고 간 그릇을 씻어놓기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는 은비 대신 마당을 쓸고 명패를 똑바로 고쳐 달곤 했다. 그런 날이면 은비는 다락방에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잔뜩 신이 나 내달리는 감자와 그 옆에서 공을 던져 주며 놀고 있는 유나를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나다가도 슬펐다.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라도, 러닝타임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니까.

 

 

 

 

 

 

 

 

 

 

 

 

 

 걱정했던 것처럼 며칠 뒤 유나는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어느 날은 밤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아침에 나타나지 않은 적도 많았다. 늦은 밤까지 코코아 두 잔을 들고 기다리다가 식어버린 한 잔을 유나의 책상에 놓고 오는 날의 연속이었다. 언제 어떻게 드나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방을 정돈할 때면 유나의 컵도 언제나 비워져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됐지. 은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끔은 참을 수 없이 유나가 보고 싶었다. 텅 빈 감자의 밥그릇에 사료를 붓다가 감자와 함께 마당을 뛰어다니던 유나의 모습이 생각나서 치솟은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감자야, 너도 유나 씨 보고 싶지?”

 

 

 

 

 

 

 

 

 은비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컹컹 짖는 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감자는 그게 아니라는 듯 폴짝폴짝 뛰었다. 이건, 그때와 같은데. 은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유나가 문가에 서 있었다.

 

 

 

 

 

 

 

 

“감자가 오랜만이라고 저 못 알아 보는 거에요? 서운하게.”

“유나 씨가 워낙 안 놀아주니까.. 볼이 그게 뭐에요?”

“아, 이거요? 좀 긁혔어요.”

“거기 꼼짝 말고 있어요.”

 

 

 

 

 

 

 

 

 긁혔다고 웃어 넘기기에는, 유나의 볼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팔과 다리에도 여기저기 상처와 멍이 남아 있었다. 상처 없이 깨끗한 건 유나의 손에 들린 카메라뿐이었다. 구급상자를 꺼내 온 은비는 사정 없이 유나의 상처에 소독약을 발랐다. 그 손길에 이렇게 걱정시키고 다치고 오는 유나에 대한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아파요.”

“아파도 싸요. 스무 살 넘은 사람 치료해 준 게 얼마만인지 알아요?”

“은비 씨 무서운 사람이었네요.”

“말을 안 듣잖아요.”

“감자보다는 말 잘 듣는 거 같은데..”

“감자랑 비교당하고 싶어요?”

 

 

 

 

 

 

 

 

 눈물을 한 방울 매단 채 거친 치료법에 대해 항의를 하던 유나는 곧 제 말이 우스웠다는 걸 깨닫고 푸스스 웃어버렸다. 은비는 그 웃음소리에 며칠 동안 쌓여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 서운함, 짜증, 걱정,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때서야 유나와 아주 가까이 붙어 있다는 걸 알았다. 밴드를 유나의 볼에 붙이는 손이 조금 흔들렸다. 그 순간 유나가 은비의 손목을 잡아 뗐다. 그 손 끝으로 미친 듯이 올라가는 제 심박수가 느껴질 거라고, 은비는 생각했다. 입술이 닿았다. 소독약 냄새와 따뜻한 입술과 차가운 유나의 손길이 온통 뒤섞였다.

 

 

 

 

입술을 떼고 나서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서로 쳐다보았다. 은비는 제 손목을 잡은 유나의 손이 어느새 따뜻해졌다는 걸 알았다.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을 때쯤 유나가 입을 열었다.

 

 

 

 

 

 

 

 

 

“은비 씨, 저한테 애인 있냐고 물어보셨죠.”

“말하지 마요.”

“저 여자 좋아해요.”

“..진짜 말 안 듣네요.”

“말하고 싶었어요. 아니, 말하지 않으면 떠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

“이제 겨우 떠날 수 있게 됐네요.”

 

 

 

 

 

 

 

 

 

 

 

다음날 정말 유나는 떠났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지만, 이번에는 처음 왔던 날처럼 많은 짐을 등에 지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은비는 유나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동안 대문을 떠나지 못했다. 한 사람을 들이고 보내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라는 걸 너무 오랜만에 실감했다. 그날 밤 은비는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길고 긴 겨울밤이었다.

 

 

 

 

 

 

 

 

 

 

 

 

 

 

 

 

 

 

 

한 계절이 흘렀다. 냇가에는 얼음이 녹아 물이 흘렀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숲이 연두색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은 기지개를 펴고 산과 들로 나섰다. 그 동안 게스트하우스에는 여러 사람이 들었다 갔고, 너무 바쁘지도 너무 한가하지도 않게 굴러갔다. 이제 감자는 어엿한 개와 강아지 사이의 어딘가의 모습으로 은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은비도 다가오는 봄을 준비했다. 문을 새로 칠하고 마당에 심을 꽃을 고르느라 바빴다. 하지만 여전히 이불 빨래를 널고 걷을 때면 가끔 울었다.

 

 

 

 

 

 

 

 

“은비 씨, 문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오늘 택배 있어요?”

“오늘은 택배가 아니라 편지가 하나 있던데.. 찾았다.”

“편지요?”

 

 

 

 

 

 

 

 

우체부 아저씨는 여느 때와 다르게 푸른 빛의 편지봉투를 건넸다. 편지가 올 곳이 없는데, 의아해 하던 은비는 봉투를 뒤집어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최유나, 분명 그 세 글자였다.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봉투를 찢어 뜯었다. 펄럭거리며 편지지와 함께 쏟아지는 사진은 감자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것도, 마당을 쓸고 있는 것도, 식탁에 엎드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도 전부 은비였다. 사진 더미를 헤치고 나자 편지는 단 한 장이었다. 꾹꾹 눌러 쓴 듯 연필 자국이 편지지 뒷면에도 도드라지게 만져졌다.

 

 

 

 

 

 

 

 

『잘 지내고 있어요? 졸업 후로 제대로 찍은 사람 사진은 처음이라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다음 계절이 오기 전에 다시 만나요.』

 

 

 

 

 

 

 

 

 

 옆에서 유나가 속삭이는 것처럼 또렷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는 그제서야 환하게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감자가 꼬리를 홰홰 치며 은비 주변을 맴돌았다.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게스트하우스에는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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