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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즈/연작

1학년

 

 

 

 

 

 

 

 

비 오는 교실은 차갑고 눅눅하고 어두웠다. 아무리 형광등을 밝게 켜놓아도 햇빛이 닿지 않는 건물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칙칙했다. 게다가 물을 머금어 무거워진 공기 사이로 평소에는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까지 퍼지며 웅성거리는 소음을 냈다. 주의를 충분히 기울이지 않으면 교복과 스타킹이 젖어버린다는 것까지도 비 오는 날을 싫어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은비는 우산의 물기를 꼼꼼히 털어낸 후 복도 바닥에 빗방울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교실로 향했다. 이미 부주의한 아이들이 한바탕 지나간 흔적이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내려앉는 습기를 떨쳐내려는 것처럼 시끄럽게 떠들던 교실은 은비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조용해졌다.

 

 

 

대체 내 눈치를 봐서 어쩌자고.

 

 

 

 

 

은비는 더 기분이 나빠졌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웃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의도치 않은 오해를 사서 피곤한 적이 많았던 지난날을 생각해 일부러라도 웃고 다니라는 사촌 언니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 너나 나나 안 웃으면 무서워 보이니까.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한 소정의 목소리에 은비는 책상에 엎드려 팔에 고개를 묻었다. 나는 그저 눈에 띄고 싶지도,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을 뿐인데. 소박한 욕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게 은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드르륵

 

 

 

 

 

 

 

 

오래되고 무거운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 그리고 둘. 이 반에 은비보다 늦게 등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나는 담임, 그리고 또 하나는..?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우와, 예쁘다. 처음 보는데. 전학 왔나봐. 전학생? 평소라면 스쳐 지나갈 작은 단어들이 습한 공기에 달라붙듯 은비의 귀에 박혔다. 은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벌써 지루해진 초록색 칠판과 무언가 항상 종이가 너저분하게 붙어 있는 게시판, 항상 똑 같은 담임의 얼굴, 그리고, 한 여자아이.

 

 

 

 

 

 

 

 

 “오늘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이름은 김예원이고, 중학교 때 미국에 갔다가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니까 잘들 챙겨줘. 예원이가 자기 소개 간단히 해볼까?”

 “네, 선생님.”

 

 

 

 

 

 

 

 

‘미국’이라는 단어에 웅성거리는 소리는 더 커졌다. 아이들은 언제나 나와 다른 무언가를 보면 동경한다.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반응에 은비는 다시 모든 것이 권태롭고 지루해졌다. 턱을 괸 얼굴은 아직 전학생을 향하고 있었지만 아까 전과 같은 호기심은 없었다. 그 순간, 전학생의 시선이 은비에게 닿았다. 이 어둡고 칙칙한 장소에서도 단연 반짝거리는 그 눈동자가 은비를 발견했다.

 

 

 

뭐, 어쩌자고. 은비는 본능적으로 그 시선을 경계했다. 그렇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면 으레 또래 아이들은 몸을 사리곤 했다. 은비의 가장 큰 무기이자 약점이었다. 하지만 전학생은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눈초리에도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안녕, 난 김예원이라고 해. 또박또박 한 단어씩 내뱉는 목소리는 분명 교실 전체로 퍼졌지만, 예원은 은비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기분이 나빴다. 은비는 다시 책상 위로 엎드렸다. 먼저 시선을 뗐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이상한 기분이었다. 애써 눈을 감고 1교시가 무슨 과목이었는지 떠올리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빗소리와 습기를 뚫고 달큰한 향이 아주 가까이서 번졌다.

 

그제서야 은비는 자기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날 받은 강렬한 인상만큼이나 김예원은 이상했다. 미국에서 배워온 것 같은 자연스러운 친화력으로 며칠도 안 돼 반 친구들 모두와 친해지고, 지나치게 까불거리거나 시끄럽게 굴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이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할 줄 알았다. 전학 온 지 일주일도 안 돼 열린 반장선거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해 반장이 된 것이 전혀 신기하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까지는 이상하다기보다는 그저 은비와 다른 점이 많은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김예원이, 저를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짝에게 항상 똑같이 밝은 얼굴과 말투로 말을 건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은비야, 안녕

 은비야, 나 지우개 좀 빌려줘

 은비야, 다음 시간 체육 수업이래

 은비야

 은비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살면서 수도 없이 들어본 그 세 글자가 그렇게 생경하게 들리게 될 줄은. 은비는 자꾸만 간지럽게 제 이름을 부르는 예원에게 결국 짜증을 냈다.

 

 

 

 

 

 

 

 

 “야, 그만 좀 불러.”

 “응?”

 “은비야, 이거 그만 부르라고.”

 “그럼 은비를 은비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뭐?”

 “네 이름 황은비 아니야..?”

 

 

 

 

 

 

 

 

생각지도 못한 반문에 은비는 어이가 없어서 그만 웃어버렸다. 누가 내 이름이 황은비가 아니라 그랬냐, 그냥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거지. 하지만 예원은 은비의 뾰로통한 대답에도 그저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을 뿐이었다.

 

 

 

 

 

 

 

 

 “은비 너도 웃었다, 그치?”

 “참나.. 그래, 웃었다. 어쩔래?”

 “웃으니까 예쁘다. 자주 웃어줘.”

 “…뭐래.”

 

 

 

 

 

 

 

 

하여간, 김예원이랑 대화를 한 내가 바보지. 은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그 날 밤, 집에 가서 거울 앞에서 여러 번 웃어 본 은비는 느닷없이 부끄러워져서 거울을 홱 돌려놓았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대화는 아주 조금씩 길어졌다. 안녕, 하는 인사에 은비가 가방을 내려놓고 고개를 까딱 하면 예원이 빙그레 웃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은비는 예원이 쓰는 핸드크림이 아몬드향이지만 사실 예원이 아몬드향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 가장 싫어하는 과목은 과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술을 잘 하는 편이어서 예체능으로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그걸 원하지 않으셔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오게 됐다는 것도. 즐겁지 않은 주제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예원은 항상 미소를 지었다. 은비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예원, 넌 뭐가 그렇게 좋냐? 왜 맨날 웃고 다녀.”

 “재미있잖아.”

 “뭐가?”

 “너.”

 “내가 웃기다는 거야?”

 “내가 이렇게 얘기를 하면 은비 네 눈썹이 이렇게 됐다가, 입이 삐죽 나왔다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밥 먹으러 가자, 그러잖아. 보고 있으면 재밌는데.”

 

 

 

 

 

 

 

 

은비는 자기 표정을 열심히 따라 하는 예원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바보야, 못생겼거든? 나 진짜 못생겼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바로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하는 은비의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예원이 얄미웠다.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뭘?”

 “대답해줄 거야?”

 “들어봐서.”

 “하여간, 심술은.”

 “묻기 싫음 말든가.”

 “그땐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웠어?”

 “그때?”

 “나 전학 온 날.”

 “아…”

 

 

 

 

 

 

 

 

난 비 오는 날이 싫어. 우산 없이 비 맞고 집에 간 적이 있어서. 우리 집은 다 바쁘거든.

 

 

 

은비는 교복을 입고 나서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말을 했다. 어린애 취급 받고 싶지 않아서, 얘기해봤자 바뀌는 것도 없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꺼내지 않았던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할까. 은비는 차마 예원을 쳐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예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없이 은비의 손을 잡았다. 항상 혼자서 상상해 왔던 것처럼, 예원의 손은 따뜻했다.

 

 

됐지? 나 간다. 예원의 손을 놓아버리고 교실 문을 박차고 걸어 나오는 은비의 심장이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난 것처럼 쿵쿵 뛰었다. 땀이 찬 것 같아서 자꾸만 교복 마이에 손을 닦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예원은 어딜 가나 은비의 손을 잡고 다녔다. 언제 어디서든 예원의 곁에는 은비가, 은비의 곁에는 예원이 있는 식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은비를 무서워하던 아이들도 하나 둘 예원과 함께 있는 은비의 곁으로 다가왔다.

 

 

 

 

 

 

 

 

 “나 그때 너 엄청 무서운 앤 줄 알았는데.”

 “맞아, 나도.”

 “눈 마주치면 괜히 무서워가지고 다른 데 본 척하고 그랬잖아.”

 “참나, 누가 들으면 내가 너네 잡아먹으려고 한 줄 알겠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은비 요새 많이 부드러워진 건 사실이야.”

 “맞아, 자주 웃기도 하고.”

 “웃으니까 좀 예쁜 것 같기도.”

 “그걸 이제 알았어? 나 예쁘거든?”

 “으으, 뭐래.”

 “왜, 은비 예쁘지 않아?”

 

 

 

 

 

 

 

친구들의 장난 섞인 야유에도 예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쥐었다. 키에 비해 커다란 예원의 손이 은비의 얼굴을 더 작아 보이게 했다. 예원의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이 아마도 빨개졌을 거라고, 은비는 생각했다. 가끔 김예원은 친구 같았다가 언니 같았다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가 가장 잘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김예원은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많고, 말도 잘 하지만, 이상하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 다른 사람들보다 0.5초가 느리다. 그리고 나서 마주치는 눈동자가 예쁘다. 은비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듣기 좋다. 그리고, 그리고…

 

 

 

 

 

 

 

 

 

 

 

 

 

툭, 투둑,

 

 

 

 

 

 

 

은비의 생각을 방해하는 것처럼 빗방울은 갑작스럽게 쏟아졌다. 그제서야 은비는 어젯밤 어렴풋이 비가 올 테니 우산을 챙겨가라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조금씩 커지는 빗소리에 교실은 부산스러워졌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기 어려운 소음이었다. 우산을 꺼내는 아이들 틈에서 은비는 그저 책상에 엎드려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종례가 마치자마자 빨갛고 노란 우산들이 교문을 나섰다.

 

 

 

 

 

 

 

 

은비는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학교와 운동장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빗방울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부지런히 흩날렸다. 빗줄기를 가늠해보려고 손을 뻗자, 금방 차갑게 물이 들었다. 교복이 흠뻑 젖을 걸 생각하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은비의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찡그리면 못생겨지네, 은비 너도.”

 

 

 

 

 

 

 

제멋대로 등장해 재미 없는 농담이나 던지는 김예원을, 은비는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예원은 은비에게 더 바싹 붙어 왔다. 예원의 검정색 가디건이 은비의 왼팔에 그대로 닿았다.

 

 

 

 

 

 

 

 “왜 아직 안 갔어?”

 “비 오잖아.”

 

 

 

 

 

 

 

같이 가자.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으면서, 예원이 은비의 손을 잡아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따뜻한 손이었다. 가만히 서 있던 은비는 입술을 깨물고 조심스럽게 깍지를 끼었다. 푸른 색 우산 아래의 세상은 두 사람만을 위한 것처럼 좁고, 넓었다. 17살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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