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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즈/연작

사계_여름 그리고 가을

 

 

 

 

 

 

 아, 빨리 가을 왔으면 좋겠다.

 응? 아직 8월인데..

 나는 여름이 싫어. 덥고, 끈적끈적하잖아.

 그래도, 너랑 내 생일 다 여름이잖아.

 ..그것도 별로야. 나 먼저 잔다.

 뭐야, 황은비, 벌써 자게? 그럼 끊지 말고 내가 하는 얘기 들으면서 자.

 

 

 

 

 

 

 

 

 

에어컨을 끈 후에도 제법 시원하게 피부에 내려앉는 공기는 잠시 지금 이 계절이 후덥지근하고 끈적끈적한 여름이 아니라 가을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했다. 선선한 바람과 열기가 누그러진 햇빛 아래 나뭇잎이 물들어 가는 걸 언제까지고 감상할 수 있는 나날들. 소풍, 운동회, 축제, 굳이 이런 기억이 아니더라도 가을은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다. 아직 너무 먼 것 같다가 어느새 훅 다가와서는 금방 찬 기운에 스러져 갈 그 계절은 분명 아직 오지 않았다.

 

 

 

 

 

 

 

 

 

가을, 그 단어를 시작으로 은비는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먼저 잔다고 은비가 입을 다물어 버린 후에도 계속 이어지던 목소리. 어디까지 듣다가 잠들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개운할 정도로 깊게 자고 일어난 건 그 덕분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김예원, 이상한 애야. 잔다는데 왜 계속 속닥거리고 그런대.

 

 

 

 

은비와 예원은 언제 처음 만났는지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오랜 친구였다.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교.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대학도 같이 갔냐는 어른들의 질문에 얘가 나 따라온 거야! 하고 심술을 부렸지만, 사실 낯선 환경을 싫어하는 은비로서는 예원과 같이 대학에 가게 된 게 결코 싫지 않았다. 첫 증명사진을 찍을 때도, 소풍에 가서 입을 옷을 고를 때도, 졸업사진 잘 나와야 된다고 어설프게 고데기로 머리를 다듬을 때도, 은비의 옆에는 예원이, 예원의 옆에는 은비가 있었다.

 

 

 

 

 

 

- 황은비 씨, 빨리 씻고 나오시죠 

 

 

 

 

지잉 울리는 휴대폰 화면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 연락을 한 건 예원일 것이다. 애초에 한 학기 만에 방학에 불러낼 정도로 친한 친구를 만들지 않았으니까. 은비는 조금 귀찮았지만 일어나 주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예원의 잔소리를 한참 들어야 한다. 화를 내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지만 조곤조곤, ‘그러니까 일찍 일어나라고 했지’로 시작해 ‘다음엔 늦지 마’로 끝날 그 잔소리. 들리지 않아도 자동으로 재생되는 그 목소리에 은비는 조금 웃어버렸다.

 

 

 

 

 

 

 “어, 웬일이야? 네가 나갈 준비를 다하고.”

 “그러는 언니야말로 어디 가?”

 “꼬맹이는 몰라도 돼.”

 “뻔하지, 그 멀대 같이 큰 조교님 만나러 가는 거 맞지?”

 “멀대가 뭐야, 멀대가. 하여간 황은비, 가끔 진짜 이모 같이 말한다니까.”

 “내가 그럼 우리 엄마처럼 말하지, 누구처럼 말하겠어?”

 “너는 어디 가? 예원이 만나러 가?”

 “비밀.”

 “비밀은 무슨, 너 친구 김예원 밖에 없잖아.”

 “네, 네, 빨리 좀 나가주실래요?”

 “안 그래도 지금 나가려고 했거든요?”

 

 

 

 

 

장난기 가득한 사촌언니의 직구를 멋지게 받아 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사실이어서, 은비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러는 정예린 씨도 맨날 키 큰 그 언니만 만나면서,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예린이 뭐라고 반격할지 너무 뻔한 공격이었다. 애인이랑 친구랑 같아?

 

 

흥, 아주 그냥 애인 있는 게 벼슬이야, 벼슬.

 

 

 

은비의 기분은 순식간에 가을에서 여름으로 곤두박질쳤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세게 튼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기분 나빠. 언젠가부터 저 말이 기분 나빴을까. 알 수 없었다.

 

 

 

 

 

 

 

 

 

 

 

입추(立秋)가 지났다는데 가을은 아직 올 생각이 없는지 뜨거운 햇살이 도로와 건물을 사정없이 달구었다. 누가 여름 한복판에 입추 같은 걸 집어넣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든 거야. 은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에 든 선풍기를 가장 강한 세기로 틀었다. 그래도 이 더위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는지 집 앞 카페가 이렇게 멀었던가 싶게 목덜미에 땀이 맺혔다. 가장 시원한 옷과 가장 예쁜 옷 중에 10분 넘게 고민을 하다 가장 예쁜 옷을 고른 탓이었다.

 

대체 왜 가장 시원한 옷이 가장 예쁘지 않은 거야? 은비는 그런 짜증을 내며 카페 유리문을 조금 세게 밀었다. 항상 앉는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예원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반 정도 남은 아메리카노 하나, 방금 나온 게 분명한 아이스 녹차라떼 하나, 두 개의 유리컵을 앞에 두고서.

 

 

 

 

 

 “어서 와!”

 “뭐가 그렇게 재밌어?”

 “혼자 생각했거든. 황은비가 표정을 찡그리면서 들어올까, 웃으면서 들어올까. 어제 여름이 싫다고 했으니까 엄청 짜증내면서 오지 않을까? 근데 딱 네가 찌푸린 얼굴로 들어오잖아.”

 “오늘 같은 날씨에 웃고 다닐 수가 있어??”

 “봐봐, 저기 저 사람도 웃고 있고, 저 사람도 웃고 있는데?”

 “..노트북이나 꺼내시죠, 김예원 씨.”

 

 

 

 

 

뭐가 그렇게 재미 있는지 계속 싱글싱글 웃고 있는 예원과 오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은비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방학이 다 끝나기 전에 같이 여행을 가기로 한 두 사람은 오늘 드디어 계획을 짜기로 했던 것이다. 외박이나 여행에 깐깐한 은비의 부모님이지만, 예원과 함께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허락해 주실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

 

 

 

 

 

 “은비 너는 어디 가고 싶어?”

 “나 아무데나 괜찮은데.”

 “그래도, 동해, 남해, 이런 식으로 더 가고 싶은 곳은 없어?”

 “예원이 너는?”

 “음.. 나는 네가 가고 싶은 데 가고 싶어.”

 “뭐야, 그게.”

 

 

 

 

나쁘다. 눈을 마주쳐 오며 그렇게 말하는 건 반칙 아닌가. 은비는 조금 심술이 났다. 김예원은 자기가 다정한 걸 모른다. 아니, 알고 있어도 상관하지 않는 거겠지. 오랫동안 붙어 다니며 각자 좋아하는 음식도, 목소리도, 생김새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딱 하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예원의 다정함일 것이다. 다정함도 부지런함이라더니, 쓸데없이 이런 데서까지 부지런한 김예원.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예원을 좋아했다.

 

 

 

 

 “아 맞다, 유나 언니가 그러는데,”

 “유나 언니가 누군데?”

 “왜, 그, 영문학개론 조교 언니 있잖아.”

 “..언제부터 조교님이 유나 언니가 됐어?”

 “너도 과사 조교님한테 소원 언니라고 하잖아.”

 “그건 예린 언니랑 사귀니까 그런 거고.”

 “그럼 유나 언니를 유나 언니라고 하지 뭐라고 불러..?”

 “..그래, ‘유나 언니’가 뭐랬는데?”

 “유나 언니랑 은비 언니랑 여수 다녀왔는데 되게 좋았대. 바다도 예쁘고, 걷기도 좋고.”

 

 

 

 

 

그 말까지 들으니 더욱 분명히 기억이 났다. 저랑 이름도 같고 키도 비슷한 대학원생 언니랑 항상 붙어 다니는, 키도 크고 친절한 최유나 조교님. 예쁜데 성격까지 좋다고 팬심을 숨기지 않는 동기들이 한둘이 아닌 그 사람 말이다. 그 착하게 생긴 얼굴을 떠올려 보면 자기가 다녀온 경험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유나 언니라니.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진 건데?

 

 

 

 

 

 “안 가.”

 “응?”

 “여수 안 갈래. 다른 데 가.”

 “뭐야, 아무데나 괜찮다며.”

 “몰라, 여수는 마음에 안 들어.”

 

 

 

 

너 바다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예원의 눈을 피한 은비는 빨대를 들어 신경질적으로 녹차라떼를 휘저었다. 분명 자주 오는 카페인데도 오늘따라 맛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예원과 함께 왔던 곳이다. 네가 좋아할 만한 카페를 찾았다며 굳이 집 앞까지 찾아와 얼른 나오라는 성화에 못 이겨 따라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단골이 되어 있었다. 카페도, 음악도, 좋아하는 영화까지도 예원의 추천은 매번 틀림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항상 그런 식이었다. 취향이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사람, 서로 생각이 다를 때에는 귀를 기울이고 조용히 맞춰주는 사람, 내 사람 김예원.

 

 

 

 

 

 

 

 

 

그런데 왜일까, 요즘따라 은비는 자꾸 예원에게 어깃장을 놓았다. 여름이 싫다는 말도, 여수에 가지 않겠다는 말도, 모두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사춘기도 아니고 이렇게 불퉁거리다가는 아무리 착한 예원이라도 짜증을 낼 것 같아 항상 후회를 하면서도 이미 말을 내뱉은 후였다. 그럼 예원은 언제나 잠시 눈을 깜박이고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은비의 짜증은 다시 제게로 돌아갔다. 왜 항상 나만 이렇게 되는 거야. 되게 못된 사람 같잖아.

 

 

아니, 이건 예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왜 다 받아주는 거야? 우리는 오랜 친구니까? 그냥, 그게 다야? 은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또, 또, 이런 생각하지. 하지만 잠시 멈추었던 생각은 물이 흐르듯 다시 예원에게 닿는다. 곧 예원이 생일인데, 뭐하지? 아무래도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더위 때문에 머리가 조금 고장난 게 틀림 없었다.

 

 

 

 

 

 

 

 

 

 

여행 계획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헤어진 그 날 이후, 예원의 연락은 조금 뜸해졌다. 매일 메신저 앱으로 대화를 주고 받기는 했지만, 그저 안부를 묻거나 날씨가 어떻다거나 하는 의미 없는 말이 전부였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줄어들수록 은비의 생각은 길어졌다. 항상 먼저 만날 약속을 잡고 말을 걸어오던 건 예원이었다는 걸, 은비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요새는 왜 이렇게 집 밖에 안 나가?”

 “더워.”

 “오늘 예원이 생일 아니야? 같이 워터파크라도 다녀오지 그랬어.”

 “김예원 바쁜 거 같아.”

 “뭐야, 벌써 말해봤어?”

 “아니, 걔가 연락을 안 하더라고.”

 “그럼 네가 연락하면 되잖아.”

 “싫어.”

 “뭐야, 황은비 이상해.”

 “..이 더위에 소풍 간다고 도시락 싸는 언니가 더 이상해.”

 “어쩔 수 없잖아, 소정 언니가 내 생일이라고 소풍 가자는데!”

 

 

 

 

김예원이 다른 사람이랑 만나야 한다고 거절하면 어떡해? 은비는 끝끝내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하루종일 붙어 있던 고등학교 시절은 끝났다. 이제는 슬프지만 인정해야 했다. 내 김예원은 나만의 김예원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예원은 착하고 성실하고 다정하니까,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가까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은비는 그게 너무 싫다는 것도 인정하기로 했다. 예원에게 제가 1순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지난 밤 은비는 8월 19일  00시 00분 00초가 되자마자 예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기본 통화 연결음이 무심하게 이어지는데 왠지 자꾸만 침이 말랐다.

 

 

 

 

 

 “올해도 은비 네가 1등이야.”

 “아직 축하한다고 안 했거든요.”

 “축하 안 해줄 거야?”

 “생일 축하해, 김예원.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네, 황은비 씨도 저랑 같이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 거죠?”

 “너 하는 거 봐서.”

 “너 작년에도 그렇게 말한 거 알아?”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해?”

 “난 다 기억 나는데? 황은비 생일 축하 멘트 매번 비슷하잖아.”

 “네, 네, 김예원 똑똑한 거 잘 알겠구요.”

 “올해도 축하해줘서 고마워. 네 목소리 들으니까 진짜 생일 같고 좋아.”

 “..빨리 자. 다른 사람들 축하 듣지 말고.”

 

 

 

 

 

 

 

 

김예원은 뭐하고 있을까. 누구랑 만났을까. 내 생각은 안 하고 있을까. 그래도, 조금은 하지 않을까.

 

 

자꾸만 이어지는 잡생각을 떨치려고 가장 좋아하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틀어놨는데도 결국 생각의 끝은 예원에게로 향했다. 여름 해는 너무 길어서 아무리 시간을 죽여도 밝은 게 문제였다. 이럴 거면 밤에 그렇게 고민하지 말고 만나자고 할걸. 망했어. 은비는 잠잠하기만 한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그래, 김예원 좀 바쁠 수도 있지. 지금 연락하면 봐준다. 아니, 1시간 내로 하면 봐준다. 

 

..그래도 생일인데 내가 또 한 번 하지 뭐.

 

 

 

 

 

 

 

- 김예원 뭐해

 

 

 

 

 

아무 이모티콘도 없이 그렇게 보내놓고 숫자 1이 안 없어질까 봐 무서워진 은비는 얼른 휴대폰을 멀리 던져놓았다. 1초에 한번씩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나 답장을 보낸 예원이 너무 빨리 사라지는 1을 보고 당황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걱정이 무색할 만큼 예원의 답장은 칼 같이 빨랐다.

 

 

 

 

 

- 나 집이지. 은비 너는?

- 너 왜 집이야?

- 집이면 안 돼..??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계속 집에 있어, 알았지? 나 금방 도착. 

 

 

 

 

 

은비는 계속 울려대는 휴대폰을 무시하고 옷장을 활짝 열었다. 예원의 집까지는 걸어서 15분이면 닿을 거리였다.

 

 

 

 

 

 

 

 

 

 

 

 

은비와 예원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입추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던지 제법 선선해진 저녁 바람이 아무 말이 없는 두 사람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아무 대책 없이 찾아온 은비나, 그렇다고 바로 여기까지 나온 예원이나 미리 준비한 말은 없었던 게 분명했다. 매일 시답잖은 이야기로 1분 1초도 아깝다는 듯 떠들던 두 사람이기에 이런 순간은 낯설기만 했다. 은비는 저 멀리 지나가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는 예원의 옆모습을 몰래 훔쳐보았다.

 

 

 

 

 

예전에도 김예원이 이렇게 사람 긴장되게 만들고, 그랬었나.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그래, 부끄럽게.”

 “내, 내가 언제?”

 “나 본 거 아니야?”

 “..아닐걸?”

 “그게 뭐야. 오늘 황은비 진짜 이상해.”

 

 

 

 

 

오늘 하루 이상하다는 말만 몇 번째 듣는 거야. 은비는 약간 짜증이 났다.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하지만 오늘따라 김예원은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할 정도로 어른스럽고, 예뻤다. 마치 혼자 다 커버린 것처럼.

 

 

 

 

 

 “왜 집에 있었어?”

 “은비 네가 만나자고 안 하길래.”

 “뻥 치시네. 너 나 말고도 친구 많잖아.”

 “누가 그래?”

 “내가 다 봤거든?”

 

 

 

 

 

은비의 구박에도 예원은 그저 웃기만 했다. 뭐야, 진짠데. 투덜거리던 은비는 예원의 두 눈과 마주쳤다. 예원이 조금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짧은 순간이 숨을 참을 만큼 길게 느껴졌다. 당황하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은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그럼, 나를 불렀어야지, 바보야.”

 “오늘 예린 언니 생일 챙겨야 하잖아.”

 “내가 왜?? 나는 김예원 생일 챙길 건데?”

 “여름이라 싫다며?”

 “바보야, 여름에는.. 여름 방학에는 너를 자주 못 보잖아.”

 

 

 

 

 

 

뭐야, 그런 거였어? 예원의 웃음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짜증나, 김예원. 맨날 이런 식이야. 나 싫어? ..싫다고는 안 했거든요.

 

 

 

나랑 여수 가자, 은비야.

 

 

예원의 손이 은비의 손을 찾아 조심스럽게 닿았다. 그 커다란 손가락이 손가락과 얽혀 완전히 포개졌다. 은비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가을이 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이른 가을을 알리는 풀벌레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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