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윶읂(구칠즈)/조각글

Private Vacation

 

 

 

 

 

 

 

 

 

 안녕하십니까 자리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36A, 이쪽으로 쪽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Good Evening Sir.

 

 

 

 

 

 

 

 

 

 

 

 

 

아직 문이 닫히지 않은 비행기에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밀려들며 높고 낮은 목소리들이 웅성웅성 이어졌다. 은비는 가방에 넣어두었던 이어폰을 다시 꺼내 귀에 꽂았다. 가끔은 아무 노래도 켜놓지 않아도 이어폰이 필요할 때가 있기 마련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커다란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낀 은비를 힐끔거리는 시선을 던졌다. 누구야? 모르겠어. 궁금하다. 연예인인 거 너무 티 내는 거 아냐? 야, 다 들리겠다. 

 

이래서 이 시간대에 비행기를 타기 싫었는데. 몇 년 전부터 휴가를 떠날 때면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 조용히 떠나곤 했던 은비였지만, 이번만큼은 공항이 가장 붐비는 시간에,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였다.

 

 

 

 

 

 

 

 

 

 

 

 

 

 

 

 

 

빨리 출발하기나 했으면. 은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휴대폰 액정화면에 둥둥 떠다니는 시간을 확인했다. 항공권에 표시된 출발 시각까지는 이제 겨우 2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쯤 터미널에는 라스트 콜(last call)*이 울려 퍼지고 있겠지. 곧 승무원들이 저 커다란 문을 닫고 오버헤드빈, 좌석 등받이 등을 일일이 확인하고 나면 출발 사인이 떨어질 것이다.

 

* 라스트 콜 ; 항공기 탑승자에 대한 마지막 탑승 안내

 

 

 

 

 

 

 

 

 

벌써 3번이나 정독한 기내식 메뉴를 읽는 것도 싫증이 난 은비는 빳빳한 종이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두고 눈을 감았다.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어 놓을 시간이었다. 휴가 가서도 기사 안 나게 조심하라는 둥,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야 된다는 둥 비슷한 어조의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겠지만 그건 나중 문제였다. 일단 기나긴 비행을 버티고, 파랗고 투명한 하늘과 바다를 만나고 나면, 그러면,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려온 뒤늦은 휴가가 시작될 테니.

 

 

 

 

 

 

툭,

 

 

 

그 순간, 바로 옆자리에 누군가 털썩 주저앉으며 요란스레 인기척을 낸 덕분에 은비의 평화가 와장창 깨졌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저 멀리서부터 후다닥 달려오던 발걸음의 주인공이었다. 이 비행기의 마지막 탑승자이기도 한 그 사람은 줄곧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겨우 자리를 찾은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꼼짝없이 비행기를 놓쳤을걸. 은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실눈을 뜨고 그 주인공의 얼굴을 확인했다.

 

 

 

 

 

 

 

 

 

 

 

 

 “늦었네?”

 “응, 팬들 돌려보내느라.”

 “인기 좋은가 봐.”

 “그럼, 내가 누구 애인인데.”

 

 

 

 

 

 

 

 

 

 

 

상대는 급하게 뛰어온 여파로 후, 숨을 몰아 쉬며 씨익 웃었다. 은비와 똑같은 마스크 위로 숨길 수 없는 까만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말이나 못하면. 너무 늦어서 안 오는 줄 알았잖아. 말도 마. 나 영종대교에서 날아왔어 진짜로. 제법 매서운 은비의 구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 분과 초를 나누어 뛰어다녀야 하는 사람.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배우 정은비, 가수 최유나, 둘만의 휴가의 시작이었다.

 

 

 

 

 

 

 

 

 

 

 

 

 

 

 

무릇 휴가를 떠나기 가장 좋은 시기는 7월부터 8월까지 이어지는 성수기겠지만, 한국에서 가장 바쁘다는 두 사람이 동시에 시간을 내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1주일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워서 짬 날 때마다 영상통화로 서로 찾은 곳을 보여주고 스케줄을 조율하고 나서야 겨우 행선지와 일정이 정해졌다.

 

그렇게 고른 두 사람의 여행지는 새하얗게 빛나는 태양 아래 커다란 나무와 수풀이 우거지고 물고기와 산호가 투명하게 내려다 보이는 바다가 있는 섬이었다. 유나가 보내준 영상 속 사람들은 달고 새콤한 과일로 배를 채우며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 물에 뛰어들었다. 그 말은, 각자 소속사에 휴가 계획을 밝혔을 때 모두 난색을 표했을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라는 뜻이었다.

 

 

 

 

 

 

 

 

 

 “뭐? 거길 간다고? 정은비 너 바로 1면에 기사 나고 싶어?”

 “유나야, 네 팬들이 거기 없을 거 같아? 온라인으로 실시간 중계될래?”

 

 

 

 

 

 

 

 

 

하지만 언니, 은비가 벌써 왕복 비행기표를 끊어버렸는걸. 리조트도 예약했다는데? 선배님이잖아, 엄청 까마득한. 어떻게 안 간다고 해?

 

 

유나의 간단하고도 명쾌한 대답에 기가 찬 매니저가 뒷목을 잡아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달 넘게 드라마 촬영을 거의 생방송에 가까운 스케줄로 소화하면서도 매니저 얼굴을 볼 때마다 비행기표는? 숙소는? 하고 휴가를 챙긴 은비에게 모든 것을 맞출 수 밖에 없다는, 아주 단순하고도 강력한 논리였다. 물론 은비가 이번 휴가까지 마음대로 못 가게 하면 잡지 인터뷰에서 최유나랑 사귄다고 제 입으로 다 말해버리겠다고 자기 소속사 사람들을 협박했다는 사실은 비밀이었지만.

 

 

 

 

 

 

 

 

 

 “유나야, 우리 휴가 가서 커플티 입고 다닐까?”

 “나야 괜찮지만, 너네 회사에서 뭐라고 안 할까?”

 “알 게 뭐야, 휴가인데.”

 

 

 

 

 

 

 

 

아역 배우에서 천만 영화의 주인공이 될 때까지 열애설 한번 난 적 없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한 정은비가 이렇게 말했다는 걸 안다면, 기자들마저 모두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겠지. 가끔 은비도 자기가 이렇게 대담해졌다는 게 스스로 놀랍기도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뒤늦게 달려온 주제에 기내식 메뉴판에 코를 박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더니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연인의 옆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은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끔 내가 사람을 만나는 건지 커다란 강아지랑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뭐, 그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은비는 유나의 얼굴 위에 펼쳐진 기내식 메뉴를 떼어내고 담요를 목까지 꼼꼼하게 둘러주었다. '최유나 감기 기운 있는 듯' 어제 읽은 공연 후기가 자꾸만 맴돌았다. 아무래도 기내식이 나올 때쯤 따뜻한 물을 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은비도 자꾸 쏟아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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