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는 끝났다. 주연 배우들의 이름을 시작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늦은 밤, 관객도 별로 없는 작은 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흔히 그렇듯 그저 그런 줄거리에 재미도, 감동도 없이 마무리될 뿐이었다. 이따금씩 팝콘을 부스럭거리던 커플도, 잠을 몰아내기 위해 안경을 연신 치켜세우던 대학생도 영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맨 뒷자리, 정중앙에 혼자 앉은 여자는 그저 까맣고 하얀 스크린을 쳐다볼 뿐이었다. 나가는 길을 안내하던 알바생은 모두 나간 줄 알고 쓰레기를 치우다가 여자를 발견하고 머뭇거렸다. 하루에 한두 편 걸릴까 말까 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고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혹시 잠든 건 아닐까. 그렇게 추측하며 알바생은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다가갔다. 미동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그 모습을 멀리서 본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제서야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고 똑바로 알바생을 쳐다보는 여자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결국 알바생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다.
“저.. 죄, 죄송합니다. 다음 상영을 위해서 자리를 정돈하던 중이었어요.”
하지만 애초에 여자는 알바생이 무슨 말을 하든 관심이 없었다는 듯 가타부타 말이 없이 코트와 가방을 챙겨 일어날 뿐이었다. 그렇게 여자는 영화관을 떠났다.
여자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은 휴대폰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본 영화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아무 연락도 없었다는 것, 그 사실이 여자의 마음을 후벼팠다.
최유나,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어.
유나와 은비는 5년째 사귀고 있는 사이였다. 같이 산 지도 2년이 다 되어가는 두 사람을, 주위에서는 모두 입을 모아 부부라고 불렀다. 그럴 때면 두 사람은 웃으며 서로 마주볼 뿐이었다. 아침이면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밤이면 눈을 마주하고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나날이 점점 더 단단하게 쌓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평온했던 마음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평화롭고 따뜻했던 마음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은비는 결코 유나의 최근 행태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번 불어 닥친 불안과 혼란은 시간을 1분 1초 쪼개어 마음을 괴롭혔다.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던 은비는 충동적으로 집 앞 영화관에서 아무 영화나 골라 앉았지만,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 고통은 어디서나 똑같았다.
결국 그날 밤, 유나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2.
“잠은 좀 잤어? 밥은? 얼굴이 이게 뭐야.”
예나 지금이나 다정한 예린의 말투에 은비는 애써 웃어 보였다. 나는 괜찮아, 언니. 이런 말을 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발로나 초콜릿을 진득하게 녹여 마시멜로우를 얹은 음료는 다분히 은비의 취향을 고려한 예린의 배려였다. 누구나 이 추위에 얇은 코트 하나에 몸을 맡긴 사람을 보면 따뜻한 음료를 내주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만.
“지난번에 얘기한 건 그대로인가 보네.”
“응, 어제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더라.”
“..믿기지가 않는다. 최유나가, 집에 안 들어왔어?”
“시간이 가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씁쓸하게 웃는 은비를 보며 예린은 선뜻 아무 위로도 건네지 못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최유나와 정은비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상 모두가 변해도 두 사람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은비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던 예린은 곧 그만두었다. 그랬다가는 은비가 정말로 무너질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이 생긴 거야?”
“모르겠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요즘 유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그건 은비의 진심이었다.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유나에 대해 가장 모르는 것 같은 느낌. 그게 요즘 은비의 상태였고, 가장 비참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으면 좋겠어.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은비를 보며 예린은 무거운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김 서린 창문 밖으로 잔뜩 몸을 움츠린 사람들이 음울한 표정으로 길을 걸어다녔다.
#3.
모처럼 날이 포근한 아침이었다. 하지만 침대에는 한기가 돌았다. 겨우 잠이 들었던 은비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TV 소리에 유나가 집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은비의 옆자리는 아무도 들고 난 흔적이 없었다.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입술을 물고 심호흡을 했다. 아침부터 눈물을 흘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
“새벽 2시쯤. 너 자고 있길래 그냥 쇼파에서 잤어.”
“요새 많이 바쁜가 봐.”
“응, 조금.”
“밥 먹을래?”
“아니, 배 안 고파.”
6마디, 두 사람이 1주일 동안 가장 오래 나눈 대화였다. 무심하게 리모콘을 누르며 채널을 바꾸고 있는 유나의 얼굴이 평온했다.
어디서 뭐했는데? 나한테 더 할 말 없어?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랑, 헤어지고 싶어?
묻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은비는 퍽퍽한 빵을 삼켰다. 질문의 끝은 결국 하나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아직은,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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