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윶읂(구칠즈)/단편

Sunday Morning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맺히고 겨우내 딱딱하게 굳어 있던 흙이 질척거려도 아직 이른 아침 공기는 볼을 빨갛게 할 정도로 찼다. 유나는 실내로 들어오고 나서야 끝까지 채워 올렸던 바람막이 지퍼를 내렸다. 내뱉는 숨이 연기처럼 번졌지만 다행히 손에 들린 배달용기는 아직 뜨끈뜨끈했다. 한바탕 달리고 났더니 몸도 후끈해진 기분이었다. 이제는 운동장에서 달릴 일이 거의 없는데도 아직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이 뿌듯했다.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멈춰 있는 걸 본 유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길쭉한 다리로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무릎이 상할지도 모르니 한번에 두 개, 세 개씩 오르는 습관을 고치라고 여러 번 혼이 났지만, 지금 그 잔소리쟁이는 옆에 없으니까 마음껏 서둘러도 좋았다.

 

 

 

 

 

또, 또, 그렇게 올라가지! 정말 너무해.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잔뜩 삐친 은비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아서 유나는 피식 웃었다. 종종, 사실 무릎이 상한다는 건 둘러대는 말이고, 아마도 한번에 두세 칸씩 오르기 어려워하는 자신과 발걸음을 맞춰 달라는 투정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철컥

 

 

 

 

 

최대한 조용히 문을 열자 아까 떠날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집안 풍경이 유나를 반겼다. 아직 은비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나는 깨끗이 손을 씻고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를 겨우 넘긴, 은비가 일요일 아침을 맞이하기엔 꽤 이른 시간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유나는 배달용기에 담긴 죽을 냄비에 옮겨 담고 쇼파에 길게 누워 어제 읽다 말고 내려놓은 책을 집어 들었다. 이미 은비가 수도 없이 읽어 조금 낡은 시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할 것을 마땅히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마땅히 사랑하는

그저 보통의 사람

 

<나태주, 내가 좋아하는 사람 中 일부>

 

 

 

 

 

 

 

 

은비의 흔적인 게 분명한, 연하지만 또렷하게 연필자국이 남은 시구(詩句)를 유나는 여러 번 곱씹어 읽었다. 그리고 가만히, 강아지를 좋아하고 나쁜 말을 싫어하는 은비에 대해 생각했다.

 

 

 

 

 

 

 

 

 

 

그 순간, 조용한 집안에 진동음이 울렸다.

 

 

 

 

 

 

  - 유쟈! 어디야 나 두고 어디 갔어ㅠㅠ

 

 

 

 

 

 

 

유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하여간, 호랑이라니까. 시집을 도로 내려놓은 유나는 아직 은비가 누워 있을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을 좋아하는 은비를 위해 온통 깜깜하게 해둔 덕분에 시간을 종잡을 수 없는 방에는 가습기만 조용히 수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요 며칠 건조하다 싶더니 어김없이 감기에 걸린 은비를 위해 틀어둔 것이었다.

 

 

 

일어났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은비의 곁에 앉아 가만히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쟀다. 제 이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온도인 걸 보니 어제 약을 먹고 일찌감치 잠든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일어나자마자 휴대폰 보면 눈 나빠져.”

 “누군 뭐 휴대폰만 보고 싶어서 보나? 눈 뜨면 맨날 옆에 없는 누구 때문에 속상하니까 그러지.”

 “몸은 좀 괜찮아?”

 “어제보단 많이 나아진 거 같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더 자.”

 “몇 신데?”

 “열 시 좀 넘었어.”

 “와, 나 12시간 넘게 잤어?”

 “처음 있는 일도 아니면서.”

 “하긴 그건 그래.”

 

 

 

 

 

 

 

 

유나는 푹 자고 일어나 훨씬 개운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은비의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자고 일어나 운동을 하고 밥을 먹는 것, 그 모든 것이 규칙적인 유나와 달리 은비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느라 밤을 새기도 하고 밥을 두 시간 동안 먹기도 하며 잠을 열두 시간 넘게 자기도 했다. 날카로우면서도 동글동글하고 도톰한 은비와 부드럽지만 분명 선 하나하나가 다듬어진 유나는 생김새도 달랐다. 운동을 싫어하고 침대를 좋아하는 정은비, 스트레스를 받으면 한바탕 뛰고 나야 가뿐해지는 최유나. 차이를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정도로 둘은 달랐다.

 

하지만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네가 너무 뜨끈뜨끈한 거 아니고? 은비 너 이렇게 있으니까 군고구마 같아.”

 “흐응, 내가 그렇게 맛있게 생겼어?”

 “까분다. 감기나 다 낫고 말해.”

 “같이 한숨 더 자자. 그러면 나을 거 같아.”

 “방금 전에 12시간 넘게 잤다고 놀랐던 사람 어디 갔어?”

 “일요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최유나 밖에 없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난을 치던 은비는 유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주말이면 같이 침대에 누워 더 이상 누워 있지 않고 싶을 때까지 유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은비지만, 눈 뜨자마자 운동을 나가는 유나 때문에 그런 일은 흔치 않았다. 사실은, 더 이상 누워있고 싶지 않은 순간이라는 건 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던 유나는 은비가 이끄는 대로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나른한 듯 즐겁게 웃는 은비의 얼굴이 예뻤다. 찬바람을 쐬고 온 직후라서 그런지, 아니면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은비와 맞닿아서인지 조금 졸린 것도 같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걸까. 유나는 조금 부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은비가 옆에 없었다. 유나는 애착인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허전하고 시무룩해졌다. 이래서 맨날 옆에 있으라고 했던 거구나. 그제서야 유나는 항상 은비의 말을 넘겨 들었던 자신을 반성했다.

 

 

 

유나는 팔과 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켠 후 거실로 나왔다. 예상대로, 은비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예능을 돌려보며 깔깔 웃고 있었다. 한 손에는 리모콘이, 다른 한 손에는 엊그제 유나에게 사오라고 조르던 아이스크림이 쥐어져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 있어? 나 혼자 두고.”

 “깼어? 이리 와.”

 “밥 먹기 전에 이런 것부터 먹으면 어떡해, 안 그래도 아픈 애가.”

 “너도 먹을래?”

 

 

 

 

 

 

 

 

유나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은비의 입술이 유나의 입술에 닿았다. 은비가 좋아하는 맛이니 당연히 그러하리라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달았다. 유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은비의 차가운 입 안을 헤집었다. 아프다고 해서 며칠을 참았던 키스였다.

 

 

 

 

 

 

 

 

 “아잇, 변태, 아이스크림 떨어뜨리면 어쩌려고..”

 “이따 치우면 되지.”

 “안 돼, 바보야.”

 

 

 

 

 

 

 

 

 

은비는 몸을 뒤틀며 어느새 맨투맨 티셔츠 속을 파고든 유나의 손을 제지했다. 하지만 제법 단호한 말투와 달리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흘렀다. 무엇이든, 은비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최유나를 잘 아는 탓이었다.

 

 

이번에도 유나는 은비가 저를 놀리는 걸 잘 알면서도 잡힌 손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아직 감기가 다 낫지 않은 은비를 무리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이 표정에 다 드러났는지 은비가 유나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착하네, 우리 유나. 말도 잘 듣고.”

 “흐음, 근데 많이 아프긴 했나 봐, 은비야.”

 “나? 왜?”

 “뱃살이 좀 줄어든 것 같, 아, 아야,”

 

 

 

 

 

 

 

 

 

유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은비는 뭐어? 하고 눈을 크게 뜨고는 유나의 등짝에 찰진 스매싱을 날렸다. 꼭 이렇게 매를 벌지, 벌어. 잔뜩 토라진 은비의 얼굴에 유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아프다는 건 다 거짓말이다. 가끔 이렇게 은비를 놀리고 나면 으레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주먹질에 괜히 기분이 더 좋아졌다.

 

 

 

 

 

 

 

 

 “나 변태 맞나 봐, 은비야.”

 “뭐? 그걸 이제 알았어?”

 

 

 

 

 

 

 

 

갑작스러운 유나의 고백에 은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밀어내려는 은비의 손길을 피해 정말 더 얇아진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은비는 매일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하지만, 햄버거를 너무 좋아하니까 아마도 평생 말랑말랑할 것이다. 그리고 유나는 그런 은비가 좋았다.

 

 

 

 

 

 

 

 

 “나 아직 안 씻었어, 저리 가아..”

 “괜찮아. 좋은 냄새 나는데?”

 “거짓말.”

 “맞아, 거짓말. 그래도 난 은비 좋아.”

 

 

 

 

 

 

 

 

은비가 사레가 들린 것처럼 마른 기침을 했다. 아마도, 아니 분명 은비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을 거라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먼저 좋아한다 예쁘다 칭찬하고 아껴주면서 막상 유나가 표현을 할 때는 항상 쑥스러워하는 은비였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믿기지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은비는 모를 것이다. 유나에게도 믿기지 않는 나날이라는 것을.

 

 

 

 

 

 

 

 

 

 “됐어, 나 밥 먹을래.”

 “아 맞다, 죽 사왔어.”

 “웬일이야, 우리 강아지? 이렇게 착한 일도 하고.”

 

 

 

 

 

 

 

 

은비는 죽을 데우기 위해 냄비 불을 올리는 유나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단단하다나, 탄탄하다나. 어쨌든 은비가 한껏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하지만 유나는 그것이 불만족스러웠다.

 

 

 

 

 

 

 

 

 

 “나 강아지 취급하지 말랬지.”

 “흐응, 그럼 이거 먹고 산책 갈까?”

 “좋아!”

 “이거 봐, 내 강아지 맞는데?”

 

 

 

 

 

 

 

 

은비와 함께 산책을 가는 기회는 흔치 않기에, 항상 알면서도 똑같은 패턴에 당하곤 했다. 이런 걸 이용하다니, 은비가 치사한 거다. 유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애꿎은 죽만 계속 저었다 . 금방 역전된 전세에 신이 난 은비가 유나의 볼을 콕콕 찔렀다.

 

 

 

 

 

 

 

 

 

 “우리 강아지 삐쳤어요?”

 “죽 먹어, 죽.”

 “이거 먹고 산책 가자, 우리. 응? 안 갈 거야?”

 “아직 감기도 다 안 나았으면서.”

 “흠, 그럼.. 아픈 애랑 침대에서 뒹구는 건 어떻게 생각해?”

 

 

 

 

 

 

 

 

그것도 당연히 안 되지, 라고 말해야 했는데, 유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비가 유나의 작은 귀를 살짝 물어버린 탓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죽을 휘젓던 나무숟가락을 든 채 굳어버린 유나를 본 은비가 박수까지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유나 많이 힘들었구나?”

 “…너랑 안 놀아.”

 “나랑 안 놀면, 누구랑 놀아?”

 “몰라, 너 미워.”

 

 

 

 

 

 

 

 

은비는 팔(八)자 눈썹을 하고 시무룩해진 유나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을 맞추었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애써 데운 죽이 다시 조금씩 식는대도 상관 없었다.

 

 

 

 

 

 

밥 먹고 진짜 침대로 다시 가는 거야, 알았지?

 

 

 

 

 

 

 

 

대낮의 햇살이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까지 비추었다. 죽도 딱 알맞게 데워졌다. 둘이서 맞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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