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윶읂(구칠즈)/단편

유나는 연상을 좋아해

 

 

 

 

 

 

 

 

 

 

 

따닥

 

 

따다닥

 

 

 

 

 

 

 

예린은 마음 속 깊은 데서 끓어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힘껏 인내심을 발휘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프로 아이돌이니까. 난 착한 언니니까. 참을 수 있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참자. 예린아, 참..

 

 

 

 

 

 

딱 딱

 

 

 

 

 

 

 

 

 “야, 정은비 너 그만해.”

 “저요?”

 “그, 손으로 식탁 딱딱 두드리는 거! 지금 몇 분째인지 알아?”

 “네에..”

 

 

 

 

 

 

 

 

꽤 높아진 제 언성에 금세 시무룩해져서 식탁 위로 엎어지는 은비를 보며 예린은 조금 미안한 기분이 되었다. 괜히 뭐라고 했나? 조금만 참을걸. 저게 뭐 그렇게 시끄러운 거라고.. 동생에게 너무 빡빡하게 굴었던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아진 예린은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침울해진 은비의 작은 등이 안쓰러워 냉장고에 몰래 숨겨둔 마카롱을 하나 꺼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채 10초도 가지 않았다. 이제는 겨우 한 조각 남은 케익을 포크로 마구 휘젓고 있는 은비를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아 진짜 정신 사납게 왜 그러는데!!”

 “제가 뭘요..”

 “아까부터 어? 막 이것저것 가만히 못 냅두고 말끝마다 축축 처지고, 왜 그래? 잠도 제일 많이 자고 아침 점심 저녁 다 잘 먹고 케익도 내 몫까지 다 먹어치웠잖아?”

 “그랬죠..”

 “왜 또, 유나가 채연이 만나러 갔어?”

 “걔 이름 꺼내지 말랬죠.”

 “어쭈, 언니 째려보는 거 봐라? 진짜 그거 때문이야?”

 “그런 거 아니거든요? 유나 지금 연습실이라고 인증 셀카도 받았거든요?”

 

 

 

 

 

 

 

 

하루종일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나 기운 없어요 기운을 온몸으로 풍기더니, 채연의 이름이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글이글 저를 뚫을 것처럼 노려보는 정은비라니. 예린은 마카롱을 꺼내는 대신 끓는 속을 달래기 위해 노란색 오렌지 주스를 집어 들고 하얀 컵에 콸콸 따랐다. 처음에는 한 잔만 따르려고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아직도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은비 몫까지 두 잔을 따랐다. 볼 찌르면 터지겠네. 진짜 쟤 때문에 수명 줄어. 귀여우면 단 줄 알지 아주?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채연이도 안 만나고 착실하게 연습실 간 유나가 뭘 잘못했어?”

 “그러게 말이에요.”

 “스카이캐슬 성대모사도 위올라이도 다 괜찮다며 유나가 하는 거면 다 좋다며.”

 “당연하죠.”

 “과자 던져 먹기 하다가 바닥에 다 흘려도 강아지 같고 귀엽다며?”

 “그거 성공하면 눈 커져서 신나 하는 거 너무너무 귀엽지 않아요?”

 “근데 대체 뭐가 문제야??”

 

 

 

 

 

 

 

 

모든 멤버들이 한번쯤은 그만하라고 투덜거리거나 진짜 여자친구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이라고 웃어넘기는 유나의 모든 순간을 다 좋아하는 은비가, 대체 왜 하루종일 저기압인 건지 예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은비라면 유나가 물구나무를 서서 밥을 먹겠다고 해도 멋지다고 박수치고 좋아할 텐데 뭐 때문에 그렇게 심기가 불편한 걸까. 예린이 건넨 머그컵을 받아들고도 한숨을 푹푹 쉬던 은비가 예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언니.”

 “뭐야, 왜 무섭게 부르고 그래.”

 “유나가 언니 좋아하는 거 알죠.”

 “나..?”

 “연상이요, 연상.”

 “그거야 뭐...”

 

 

 

 

 

 

 

 

잔뜩 찌그러진 호빵 같은 은비를 톡 치면 울 것 같아서, 예린은 나? 하고 자기를 가리켰던 손가락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 슬픈 얼굴을 보면 아니라고 대답을 해주고 싶지만, 그런 거짓말은 체질이 아니었다. 유나가 언니라면 좋아죽는 거 팬들도 다 알잖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세상이 다 알지. 대체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야..? 예린은 속으로만 대답을 이어가며 가만히 은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엄청 노력했단 말이에요. 유나 귀여워해주고 밥도 챙겨주고.”

 “은비야.. 그럴 시간에 언니들 말 잘 들을 생각도 좀 해.”

 “뭐라구요?”

 “아니,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근데 왜 유나는 저만 보면 더 장난 치고 놀리고 완전 똥강아지처럼 굴까요? 제가 그렇게 언니 같지가 않아요? 그래도 몇 개월이라도 언니는 언니인 거잖아요. 저는 언니즈, 유나는 동생즈. 안 그래요? 왜 저만 언니 대우 안 해주는 거죠?”

 

 

 

 

 

 

 

 

숨도 안 쉬고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하나 했더니, 결국 기승전 최유나가 좋아 죽겠다는 말이네. 예린은 자꾸 삐죽삐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오렌지주스를 한 컵 더 마셔야 했다. 

 

 

어쩐지 자꾸 자기보다 한 뼘이나 큰 유나 머리를 쓰다듬질 않나, 내가 해줄게! 하고 은근히 손이 가는 유나를 챙겨주질 않나, 유나가 피우는 온갖 재롱에 크게 반응을 하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다 그런 거였구나. 하여간 까다롭게 생겨가지고 단순한 정은비가 순진하게 생겨가지고 복잡한 최유나를 좋아해서 고생이 많다.

 

 

 

 

 

 

 

 

 “은하야, 언니라는 건 말이야. 노력해서 되는 게 아냐. 날 봐. 그냥 딱 봐도 언니잖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안타깝게도 유나는 연상을 좋아하지. 나나 소정 언니 대하는 것만 봐도,”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아 쫌 언니가 말하는데 자꾸 끊을래? 정은비 이 바보야!”

 “제가 왜 바보에요! 언니가 바보지!”

 “뭐? 내가 왜 바보야?”

 “바보 같은 소리를 하잖아요!”

 

 

 

 

 

 

 

 

정말이지, 오랜만에 언니답게 도와주려고 해도 난리야. 유치하게 누가 더 바보인지 같은 싸움을 한바탕 벌인 예린은 한숨을 쉬었다. 정은비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이래가지고는 유나가 ‘언니’인 나한테 고민 상담을 해왔다고 어떻게 말하겠냔 말이야.

 

 

 

 

 

 

 

 

 

언니는 동갑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냐니?

동갑 좋아해 본 적 있어요?

응? 그건 갑자기 왜?

저는 그런 생각 해본 적 없거든요, 지금까지. 근데 요즘 좀 흔들려서요.

나이가 뭐가 중요해? 정신연령이 중요하지. 예원이 봐, 막내여도 완전 어른 같잖아.

그렇죠?

 

 

 

 

 

 

예린은 지난번 같이 숙소로 걸어오던 밤 장난스럽게, 하지만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하던 유나를 떠올렸다. 사실 갑작스러운 유나의 질문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왜 요즘 흔들린다고 하는지, 왜 자꾸 숙소 자기 방을 올려다 보며 물어봤는지도.

 

조오오오을 때다. 예린은 은비가 비운 머그컵까지 두 개를 쥐어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은비를 시켜야겠지만, 지금은 설거지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정은비, 그런 걸로 고민할 거면 유나나 데리러 가. 이제 슬슬 연습 끝나겠다.”

 “지금요? 추운데..”

 “그럼 설거지 네가 할래?”

 “다녀오겠습니다!”

 “추우니까 유나 것까지 핫팩 챙겨가고!”

 

 

 

 

 

 

 

 

마지막 조언은 듣는 둥 마는 둥 냉큼 옷을 챙기러 가버리는 은비를 보며 예린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애들 키워 봤자 아무 소용 없어. 숙소에 덩그러니 남겨진 게 오늘따라 왜 이렇게 허전한지 모를 일이었다. 설거지나 하자, 설거지나. 소정 언니 보고 싶다 진짜.

 

 

 

 

 

 

 

 

 

 

 

 

 

 

 

 

 

 

 

은비가 도착하겠다고 한 시간에 맞춰 낮처럼 환하던 연습실 불이 꺼졌다. 곧 저 문을 열고 유나가 나올 거라는 생각에 은비는 패딩 주머니 속 핫팩을 더 꼭 쥐었다. 이렇게 추운 날 같이 온수매트에 누워서 영화나 보자니까, 연습이 그렇게 좋은가. 최유나, 바보, 멍청이. 하지만 춤 연습을 한 건지 앞머리가 갈라져 이마가 드러난 채 뛰어오는 유나를 보자 은비는 방금 전 생각을 모두 취소해야 했다.

 

 

 

 

 

 

 

 “유나야, 내가 사람들 앞에서 이마 보여주지 말랬지!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 은비 벌써 왔네. 힘들면 그냥 숙소에 있어도 되는데.. 많이 기다렸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 독감 나은지도 얼마 안 됐으면서 연습하니까 걱정돼서 그렇지.”

 “그때 연습 못 해서 나 혼자 자꾸 틀리는 거 같아서.”

 “그런 생각하지 마. 지금도 엄청 잘하고 있다구.”

 “그런가.. 아, 춥다. 그치?”

 “…!”

 

 

 

 

 

 

 

이때다 싶어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려던 은비는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갑자기 유나가 커다란 강아지가 다 커서도 주인 품을 찾는 것처럼 은비의 패딩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에. 은비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유나가 나한테? 이렇게 갑자기? 잠깐, 나 오늘 향수 뿌렸나? 이렇게 붙으면 내 심장소리 들리는 거 아니야? 아니, 내 뱃살 느껴질 텐데! 도망칠까? 그치만.. 그치만...

 

 

 

 

 

 

 

 

 “우리 아무데도 안 가?”

 “가, 가야지!”

 “나 배고파.”

 “배고파? 고구마 사줄까?”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편의점을 가리키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유나는 정말 강아지 같았다. 너무 귀여워!! 언니들이 이래서 유나한테 멍뭉이, 멍뭉이 그랬구나. 은비는 차오르는 짜릿한 함성을 눌러 참았다. 자꾸 지나가는 사람들이 유나의 예쁜 이마를 힐끔거리는 것 같아 자리를 옮기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고구마 말랭이와 식혜, 그리고  파스타칩을 앞에 놓고 마주앉았다. 은비가 유나에게 이걸 갖고 들어갔다간 멤버들에게 다 뺏길 거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한 덕분이었다. 고구마 말랭이와 식혜라니, 정말 유나의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불쑥 유나가 먼저 질문을 꺼냈다.

 

 

 

 

 

 

 

 

 “근데 은비야, 요새 뭐 고민 있어?”

 “고민?”

 “다시 늦게 자는 것 같길래.. 힘든 일 있나 걱정돼서.”

 

 

 

 

 

 

다정하고 진중한 최유나. 사람들이 잘 아는 유나의 모습은 이런 거였지, 은비는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요샌 매일 놀리고 장난 치는 유나만 봐서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잊고 살았다. 갑자기 억울해져서 너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왜 맨날 나 놀리고 괴롭히냐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가도, 올곧게 쳐다보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사르르 녹았다. 얼굴이, 목소리가, 눈빛이 다 최유나여서.

 

 

 

 

 

 

 

 

 “..있지, 힘든 일.”

 “진짜?”

 “맨날 말 안 듣는 똥강아지 키우느라 힘들어 죽겠어.”

 “나 때문에 힘들어?”

 

 

 

 

 

 

 

 

응, 힘들어. 자꾸 네가 좋아서 진짜 힘들어. 은비는 입술을 여러 번 달싹이다가 그냥 아하하 웃어버렸다. 장난이지, 바보야. 최유나 바보.

 

 

 

 

 

 

 

 

 “나는 은비가 어른스러워서 좋아.”

 “내가?”

 “우리 동갑이잖아. 근데 은비 보고 있으면 야무지게 자기 할 일 잘 하고, 언니 같아.”

 “그런 얘기 처음 들어보는데..”

 “나만 느낄 수 있는 그런 게 있지. 은하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뭐래, 진짜.”

 

 

 

 

 

 

 

 

은비는 유나가 손에 들고 있는 식혜를 빼앗아 꿀꺽꿀꺽 삼켰다. 장난스럽게 부르는 '은하 언니', 두 단어 때문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계속 이러다간 수명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줄어들었을지도.

 

 

 

 

 

 

 

 

 

 

 

 

 

 

 

 

숙소 앞까지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분명 추운 날씨인데도 누구도 먼저 손을 떼지 않았다. 까만 밤하늘 노란 가로등 아래 걷는 길이 오늘따라 짧았다. 이대로 영원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꼭 끝이 있는 법.

 

 

 

 

 

 

 

 

 “다 왔네.”

 “그러게..”

 “추운데 들어가자.”

 “…”

 

 

 

 

 

 

 

 

은비는 아쉬운 마음에 금방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의아한 듯 은비를 쳐다보던 유나가 씨익 웃었다.

 

 

 

 

 

 

 

 

 “아 근데 은비야 나 고백할 게 있어.”

 “고백…?”

 “나.. 어제 슬라임 갖고 놀다가 침대에 다 묻혔어..”

 “뭐? 어쩐지 이불을 다 정리하고 갔다 했어. 너 이제 예린 언니한테 걸리면 혼난다!”

 “나 혼나?”

 “…괜찮아, 매트리스 새로 사줄게. 그때까지만 나랑 같이 자.”

 “안 되는데, 은비랑 같이 자는 거 힘든데.”

 “이씨, 그럼 따로 자든가!”

 “싫어, 나 은비 좋아. 같이 자.”

 

 

 

 

 

 

 

 

씩씩거리며 공동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은비를 유나가 뒤에서 안았다. 얼마나 꽉 껴안았는지 두꺼운 패딩 너머로 유나의 팔이 느껴질 정도였다. 유나가 쓰는 샴푸 향이 아주 가까이서 퍼졌다. 바람도 스쳐 지나갈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진 두 사람 사이에는 쿵, 쿵,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모를 고동(鼓動)만 울렸다.

 

 

 

 

 

 

 

동갑내기 연애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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