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윶읂(구칠즈)/연작&연재

복수

 

 

 

 

 

 

 똑, 딱, 똑, 딱,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새벽 2시. 소파에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결국 거실을 수십 번 가로지른 은비는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분명 아침에 출근하는 뒷모습에 대고 할 얘기가 있으니 일찍 들어오라고 당부했건만 오늘도 유나는 늦게까지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일곱 개의 메시지와 다섯 번의 부재중전화, 그 중 단 하나도 답장이 오거나 연결이 되는 법이 없었다.

 

 

또 몇 분이 지났을까. 짜증과 불안감이 극도로 치솟은 은비의 예민한 귀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취한 듯 불규칙적이긴 하지만 몇 년 동안 들어 귀에 익은 발걸음임을 확신한 은비는 무의미한 제자리걸음을 멈추고 현관문 앞에 우뚝 섰다.

 

 

 

 

 

 삑, 삑, 삑, 삑. 은비의 생일로 이루어진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문고리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그리고 곧 문이 열리고 등장한 사람은 역시 조금 흐트러진 모습의 유나였다. 취하긴 했지만 아직 정신은 있는지 은비를 보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썹을 치켜세우고 커지는 동공, 그리고 꾹 다문 입매. 그 표정에 은비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혼자 유나를 기다렸던 시간보다 더, 철저하게 외로워지는 순간이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

 “응, 늦었네.”

 “피곤할 텐데 먼저 자고 있지.”

 “오늘 할 말 있다고 했으니까 일찍 올 줄 알았어.”

 “아, 그랬나.. 미안한데 할 말 있으면 내일 하자. 나 너무 피곤해.”

 “그래, 얼른 씻고 자.”

 

 

 

 은비는 제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인 채 곁을 지나쳐 가는 유나에게서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다른 여자의 향을 느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다리의 힘이 풀리는 것 같아 부러 힘을 주어 버텼다. 

 

 

 

유나야, 우리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체향이 그 어떤 향수의 향보다 좋다며 항상 집에 오자마자 저를 안고 코를 부비던 유나가 변했다는 것도, 이게 누구의 향인지 너무 확실히 알겠다는 것도 전부 다. 지금까지 계속 모르는 척 유나를 믿어왔기에, 이번에도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회식을 했겠지, 그리고 피곤하니까 얼른 쉬고 싶겠지. 곁을 지나칠 때 유독 불안해 보이고 서두르던 것 같은 느낌도, 그저 지금 이 시간까지 못 자서 내가 예민해진 것뿐이라고. 하지만 은비는 그날 밤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출렁이는 매트리스에 고개를 돌려 제 곁에 누운 유나를 찾았지만, 제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연인과의 거리는 끝없이 깊은 크레바스 같아서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딸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육중해 보이던 카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두리번거릴 것도 없이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예린이 은비의 눈에 바로 들어왔다. 어딜 가도 눈에 띄는 화려한 사람이지만, 힘없이 손을 들어 인사를 하는 예린의 얼굴을 보니 그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언니가 웬일로 이 시간에 시간이 돼요?”

 “방금 퇴근했어.”

 “요새 많이 바쁘다면서요.”

 “말도 마, 요새 거의 집에 못 들어갔어.”

 

 

 

 꽤 야윈 듯한 예린의 얼굴에 한동안 은비의 시선이 머무르다가 떨어졌다. 저를 보는 예린의 눈빛에서도 같은 감정을 보면 속상할 것 같아서. 바쁘고 힘들다면서도 깔끔하고 단정한 걸 좋아하는 사람답게 빳빳하게 다린 셔츠를 입고 나온 것이 이 상황을 더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셔츠 은비가 사준 거죠? 언니한테 잘 어울려요.”

 “빈말이어도 기분은 좋으니까 고마워.”

 “빈말 아닌데요?”

 “되게 태연하네.”

 “뭐가요?”

 “우리가 지금 왜 만나고 있는지 잊지 말아줄래요, 정은비 씨.”

 “...우리도 오랜만에 만난 건데 좀 안부도 묻고 그럼 좋잖아요.”

 “미안해, 요새 너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은비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하는 예린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아니, 누구 한 사람을 탓하기에는 이 상황 자체가 엉망진창이었다. 대학 때부터 붙어 다닌 네 사람 중 두 커플이 생겼다. 그리고 지금, 은비와 예린은 그 두 커플이 ‘한 커플과 두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을 상의하기 위해 만난 것이다. 예린도 속이 타는지 앞에 놓인 물컵을 순식간에 비워버렸다. 항상 여유로웠던 예린의 표정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은비는 예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면서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살짝 제 팔을 꼬집어 보았다. 이 와중에도 눈물이 고이도록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닌 듯했다.

 

 

 

 “요즘 좀 어때요?”

 “나 비밀이 많아요, 거의 얼굴에 써 붙이고 다녀서 모른 척해줄 수가 있어야지. 나랑 눈만 마주치면 울상이라서 내가 자리를 피해주는 게 맞나 싶다니까.”

 “유나도 뭐.. 그냥 피해 다녀요. 내가 입 열면 무슨 말 할지 다 아는 것처럼.”

 “너한테 거짓말 하긴 싫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그럼 둘 다 완전히 맘 변한 건 아니네요.”

 “..나 지금 좀 심장 떨어질 뻔 했으니까 우리 그런 말은 하지 말자. 너 유나 못 믿어?”

 

 

 

 은비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끔 싸우기도 하고 서로 화를 내기도 했지만, 유나가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서로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피부로, 숨결로 알 수 있는, 너무 당연한 것이니까.

 

 

 

그런데 몇 주 전부터 유나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뭔지 모를 막연한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형체가 분명해지고 뚜렷해지는 것은 다른 여자의 존재였다. 사귀기 전에도 몇 번이고 봤던 장난스러운 만남이 아니라 뭔가 불안하고 비밀스럽게 다른 여자와 만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때 휴대폰을 꺼내든 건 어쩌면 운명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가끔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예린에게 연락을 했던 걸까? 평소 같으면 두 사람 중 연애 상담을 할 상대를 고르라면 당연히 황은비였을 텐데.

 

 

 

 

부르튼 입술을 다시 깨물고 있는 예린을 쳐다보던 은비는 스스로 답을 내렸다. 그만큼 정은비는 최유나를 잘 알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정예린도, 황은비를. 그러니까 두 사람은 알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유나와 황은비가 너무 가까워져 버렸다는 것을.

 

 

 

 “나도 은비 믿어. 중요한 건, 얘네를 어떻게 해결하냐는 거지.”

 “언제, 어떻게 만나고 있는 건지도 알아요?”

 “예전에 은비한테 들었어, 가끔 만나서 밥 먹는다고. 서로 직장이 가깝잖아.”

“우리, 가서 보면 안 될까요? 곧 퇴근시간인데.”

 “직접 봐서 뭐하게. 나도 나지만, 넌 안 돼.”

 “그냥.. 그냥 확인하고 싶어서요. 혹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거면 어떡해요?”

 “오해.. 오해라고.. 가 보자. 대신, 가서 뭘 보든 못 본 걸로 하겠다고 약속해야 해.”

 

 

 

 예린은 정말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은비의 울 것 같은 표정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예린도 혹시 어쩌면 자기가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갖고 있기도 했다. 오늘 가서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한다면 그 희망을 붙잡고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유나와 은비의 직장이 있는 동네로 향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나와도 쉽게 발견하지 못할 만한 곳에 몸을 숨긴 은비와 예린은 초조하게 주변을 살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투덜거리는 것도 잠시, 두 사람 모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처음에 은비는 유나의 회사를, 예린은 은비의 학교를 보고 있었지만, 곧 그 두 시선은 한 곳을 향했다. 유나의 차가 회사 주차장에서 나오더니 은비의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몇 분도 안 돼 교문을 나서는 누군가를 태우고 그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세상이 멈춘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호기심은 인간을 죽이는 법이니까. 아주 조금씩 세상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쯤 가라앉은 예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은비야.”

 “네.”

 “술이나 한 잔 할까?”

 “그럴까요,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은 예린도, 창 밖을 보고 있는 은비도 아무 말도 없었다. 두 사람이 키스를 하는 걸 본 것도 아니고, 그 차가 어디로 가는 건지 알지도 못하는데, 느낌이 이렇게 분명한 것이 신기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흐릿한데도 어떻게 이 배신감만은 생생할 수 있는 걸까.

 

 

 

 

 

 

 

 

 몇 년 전 함께 대학을 다니며 수십 번은 드나들었던 술집이 가득한 거리에 예린의 차가 접어들자 은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름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아무도 모를 모텔들이 즐비한 거리. 은비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려는 예린에게 그 모텔들 중 제일 휘황찬란해 보이는 건물을 가리켜 보였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저를 쳐다보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뭐해요, 얼른 주차하고 술 사와요.”

 “은비야, 너.. 다시 생각해 봐. 정말이야?”

 “술 마시자면서요? 장소는 상관 없잖아요.”

 “..일단 사오긴 할게. 먼저 들어가 있어.”

 

 

 

 카운터에서는 여자 혼자 온 게 이상한지 힐끔거리면서도 순순히 키를 내주었다. 1004호. 하필이면 방번호가 누구 생일과 똑같다. 여기까지 와서도 유나 생각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에 은비는 비릿한 웃음만 나왔다. 1004호로 오라고 문자를 보내고 방에 들어섰다. 소문으로 듣던 것처럼 붉은 조명에 투명한 욕실, 이런 것은 없었지만 창문에 달린 두꺼운 커튼과 탁자 위에 놓인 이런저런 물건들은 이곳이 단순한 숙박업소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이불보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까 곧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린이 들고 온 검정 비닐봉지 안에는 소주 중에서도 가장 순하다는 소주 두 병과 일회용 컵, 그리고 은비가 자주 먹는 과자와 마른 안주가 들어 있었다.

 

 

 

 “이게 다에요?”

 “너 술 약하잖아. 이게 그나마 제일 순해.”

 “제가 뭐 좋아하는지도 다 기억하네요.”

 “당연하지, 우리 우정이 몇 년짜린데.”

 

 

 

 오늘 본 것 중 가장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잔을 채워주는 예린을 보며 은비는 조금은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네 사람 중 가장 먼저 친해졌던 것은 저와 예린이었는데, 두 커플이 각각 사귀게 된 이후로 예린과 이렇게 둘이 만난 기억은 거의 없었다. 유나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어쩌다 둘이 마주쳤을 때, 이렇게 아련한 기분이었을까? 그래서.. 그래서 가까이 했던 걸까. 소주의 독한 기운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마자 은비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조금씩 마시라고 제법 많이 채워 준 잔을 단번에 비워버린 은비를 보고 예린은 당황한 듯했다.

 

 

 

 “야, 그걸 한 번에 다 마시면 어떡해, 술도 약한.. 울어?”

 “언니.. 우리, 잘래요?”

 “그게 무슨...”

 

 

 

 예린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은비는 예린을 끌어당겼다. 갑자기 은비의 다리 위에 앉게 되어버린 예린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예전에 언젠가 두 명의 은비가 모여 수다를 떨다가 제 애인 자랑을 했던 날이 있었다. 예린 언니가 그렇게나 저에게 다정하고 애정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며 미소를 숨기지 못했던 그날의 황은비를 기억했다. 그때 자기가 뭐라고 대답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스쳐 지나갔던 일상 중 하나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이제 그 일상은 모두 깨져버렸다.

 

 

 

 

 

 

 

 

 

 

 

 “여기서 내려줘요.”

 “유나한테서는 연락 없어?”

 “글쎄, 확인을 안 해봐서요.. 언니는요?”

 “음.. 아까부터 전화가 여러 번 오고 있는데, 안 받았어.”

 “그래도 돼요?”

 “평소라면 가서 엄청 혼나겠지만.. 모르겠네, 어떻게든 되겠지.”

 “오늘 고마웠어요.”

 “나도. 잘 들어가.”

 

 

 

 은비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통화 5개. 집에 먼저 도착한 애인이 놀라서 전화를 걸어온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아까부터 그걸 알고 있었지만 받지 않은 것도 똑같았다. 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둘 다 울어서 눈이 빨개지고 목소리도 다 갈라진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가 어디냐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질문을 받았다가는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자기도 목까지 새빨개지도록 펑펑 울어놓고서도 친절하게 집 앞까지 데려다 준 예린 덕분에 금방 집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은비는 도저히 바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심호흡을 하고 아직 떨리는 울음기를 가라앉히고 나서야 도어락에 손을 댈 수 있었다. 하지만 비밀번호를 다 누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정은비, 대체 어딜 갔다 이제 오는.. 너 얼굴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라니, 이렇게 눈이 빨간데 그걸 말이라고.. 너 술 마셨어?”

 “응. 나 피곤해. 가서 쉴게.”

 “..나랑 얘기 좀 해. 할 얘기 있다며.”

 “이제 없어.”

 “은비야,”

 “이름 부르지 마!”

 

 

 

 

 계속 붙잡아오는 손을 뿌리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이름을 부르는 유나의 목소리에 화가 나서 벌컥 소리를 질렀다. 뒤따라오던 유나가 우뚝 멈춰서는 것이 느껴졌다. 은비는 다시 쏟아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아봤지만 눈물이 흐르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힘이 쫙 빠져나가 다리가 후들거렸다. 유나의 긴 한숨소리가 들리더니 뒤에서 안아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렇게 기다렸던 익숙하고 따뜻한 유나의 품이지만, 그 순간 마지막 인내심의 끈이 끊어져버렸다. 유나의 품에서 황은비가 쓰는 향수의 향이 느껴졌다. 그 동안 참아온 것이 터졌다. 한껏 손에 힘을 줘서 저보다 한 뼘은 큰 유나를 밀쳤다.

 

 

 

 “왜, 나한테 잘못한 게 있어서 찔려? 이제 와서 나한테 따뜻한 척할 필요 없잖아?”

 “은비야, 진정하고 우리 얘기 좀,”

 “진정? 황은비 향 밖에 안 나는 손 나한테 갖다 대지 마!”

 “...?!”

 “왜, 놀랐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네가 뭘 하느라 늦게 오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고 마냥 버려진 강아지처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니? 그런 날 두고 황은비랑 놀아나니까 좋았어? 좋았냐고, 이 나쁜 새끼야!”

 “은비야, 내 말 좀 들어 봐.”

 “그래, 나 오늘 술 마셨어. 예린 언니랑, 모텔 가서.”

 “뭐..?”

 “왜, 나는 바람 한 번 못 피울 줄 알았어? 내가 가자고 했어. 내가 술도 마시자고 했고, 내가 언니 눕혔어.”

 

 

 

 유나는 충격을 받았는지 밀쳐진 그대로 굳어 아무 말도 못하고 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에 입고 나갔던 옷에는 다른 사람의 향이 아직 배어 있지만, 둘이 함께 산 커플 슬리퍼에 왼손에 끼워진 커플링만은 은비가 알던 유나 그대로였다. 평생 변하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최유나가, 그렇게 서 있었다. 몇 주 전까지도, 아니, 맨 처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유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분명 유나의 옷에서 나는 향은 다른 은비의 향, 그것이었다. 이제 은비의 몸은 후들거리는 걸 지나 거의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가장 화나는 건 뭔지 알아? 우리 둘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너랑 은비를 배신 못 하겠더라. 내 앞에 있는 게 네가 아니라서, 내가 황은비가 아니라서, 서로 손도 못 잡았어. 너희 둘 보란 듯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하고 싶었는데, 우린 그러지도 못할 정도로 멍청하다는 것만 확인하고 왔어. 이게 얼마나 비참한지 아니?”

 “...”

 “왜.. 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우리 행복하게 살자고, 나 하나면 충분하다고 말한 건 너야 최유나!”

 

 

 

 악을 쓰고 결국 쓰러지듯 주저앉아버린 은비를 유나가 다시 안았다. 또 밀쳐내고 싶은데 익숙하고 편안한 이 품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 더 서러워 계속 울었다. 유나의 손이 계속 등을 쓸고 토닥여주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원래 최유나는 언제든 정은비를 끌어안고 몇 시간이고 등을 쓸어주고 눈물을 닦아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유나의 얼굴이 맞닿아 있는 은비의 어깨도 천천히 젖어들었다. 울음이 섞여 떨리는 유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은비야.. 내가 정말 다 잘못했어. 미안해, 잘못했어. 정말 미쳤었나 봐.”

 “......”

 “안 그래도 오늘 끝내고 오는 길이야.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내 얼굴 보기도 싫겠지만.. 미안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정은비야. 정은비 한 명 뿐이야. 나 용서해 주라. 제발 한 번만..”

 “이럴 거면서.. 대체 왜 그랬어? 나한테 왜 그랬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제발...”

 

 

 

 펑펑 우는 유나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눈물로 엉망이 됐지만, 그 까만 눈동자가 은비의 얼굴을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이 눈빛만 보면, 이 품에만 안기면 다시 떨려 하는 자기가 더 멍청한 건지, 이럴 거였으면서 다른 여자를 안았던 최유나가 더 멍청한 건지, 은비는 알 수가 없었다. 왜 흐르는 건지도 모를 눈물이 다시 한 번 시야를 가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품 안에서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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