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의 단 하나뿐인 버스 터미널에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끔벅끔벅 졸고 있는 고양이와 장기를 두는 몇몇 할아버지가 풍경처럼 숨을 쉬었다. 구름도 없이 파란 하늘 아래 울긋불긋한 나뭇잎 사이로 잠자리 몇 마리가 허공을 빙글빙글 돌았다. 하나 있는 창구 직원은 곧잘 하품을 하고 약을 간 지 오래된 커다란 벽시계는 10분도 넘게 늦었다. 그래도 터미널은 터미널이라고, 저 멀리 하루에 몇 대 없는 시외버스가 모습을 보일 때쯤이면 잠시 북적북적 활기를 찾았다가 다시 조용해지며 제 본분을 다했다.
“학생, 다 왔어. 내려야지.”
“아, 네, 감사합니다.”
은비는 저를 깨우는 기사 아저씨의 목소리에 겨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같이 타고 온 몇 안 되던 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난 버스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했다. 이미 ‘ㅌ’이 사라진 지 오래인 낡고 허름한 간판만이 여기가 이 동네 유일의 시외버스터미널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들고 버스에서 내린 은비는 긴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주위에 키가 큰 건물이 없는 탓에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이 눈앞에 시원하게 뻗었다.
여전하네. 어째 이놈의 동네는 뭐 하나 바뀌는 게 없어.
원래대로라면 친구들과 한강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을 한껏 즐기고 있었어야 할 은비가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와 있는 건 순전히 며칠 전 아빠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딸! 바빠?”
“응, 아빠, 나 지금 좀 바쁜데..”
“우리 딸 뭐가 그렇게 맨날 바쁘실까- 이번 주말에 집에 안 올래?”
“갑자기? 나 약속 있어.”
“오랜만에 딸 얼굴도 보고 이것저것 챙겨 보내고 싶어서 그러지. 뒷산에 단감도 열리고, 요새는 밤송이가 얼마나 튼실한지,”
“서울에도 밤이랑 감이랑 다 있는데?”
“그렇긴 한데,”
“다음에 갈게요, 다음에.”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집에 좀 다녀가라는 연락. 은비는 대수롭지 않게 건성으로 넘기며 읽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딸 보고 싶어하는 아빠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이렇게 연락이 올 때마다 집에 갔다가는 본가에서 통학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번에도 영 아쉬운 목소리로 밥 잘 챙겨 먹고 조심해서 다니라는 안부인사까지 남기고 나면 금방 끊으시겠지. 통화를 마치고 이 책을 마저 다 읽으려면 몇 시간이 더 필요할까 속으로 가늠해보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뛰는 딸 위에 나는 아빠가 있었다.
“아니, 글쎄, 오늘 새참 먹다가 들어보니까 건넛집 딸 유나도 이번 주에 온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 딸 생각이 나지 뭐야.”
“…유나? 최유나?”
“그래, 그 유나 말이야. 혼자 오면 심심할 텐데 친구 올 때 같이 오면 좋잖아.”
그 후로도 분명 아빠가 이런저런 말을 한 것 같은데, 사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집에 가는 버스를 예매하고, 갑작스럽게 약속을 취소하고,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고민하고, 그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졌으니까. 친구들의 원성도, 오늘따라 휑해 보이는 옷장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지금, 은비는 이곳에 와 있었다. 최유나라는 이름 세 글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너무 꾸민 것 같지는 않게, 하지만 너무 편해 보이지도 않게. 그렇게 고르고 고른 옷인데도 오늘따라 뭔가 마음에 안 들고 아쉽기만 해서 계속 터미널 대합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추다가, 은비는 그만 헛웃음이 터졌다. 그냥 집에 가는 거잖아. 대체 이게 뭐라고 이러고 있어, 은비야. 정신 차려. 하마터면 30분에 겨우 한 대 오는 시내버스를 놓칠 뻔했다.
“현북리요.”
텅텅 비어 있는 버스의 아무 자리에나 털썩 주저앉은 은비는 이 동네에 왔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그래도 승차감이 제법 괜찮아졌네. 예전에는 길이 죄다 흙과 돌부리라 의자에 앉는 게 싫을 정도로 덜컹거렸는데. 하지만 항상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탔던 누구 때문에, 은비의 등하굣길은 꼭 이 버스여야만 했다.
꼭 버스가 오기 5분 전쯤 저 멀리서 뛰어오던 그 얼굴을 못 본 척, 안 본 척하느라 얼마나 노력했는지 너는 알까? 사실은 네가 육상부라는 것도, 노래를 어지간히 잘한다는 것도, 우리 집 바로 앞에 살고 있다는 것도 나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는데. 어차피 같은 정류장에서 내려 같은 교문에 들어서야 하는데도 왜 그렇게 먼저 손을 내밀기가 싫던지.
서로 말을 트기 전까지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게 웃으며 저를 아는 척도, 모르는 척도 하지 못하던 유나를 생각하면 은비는 지금도 웃음이 났다. 최유나도 참 최유나다. 안녕, 나는 최유나라고 해. 우리 같은 동네 살지? 그 두 마디면 됐을 걸 왜 그렇게 오랫동안 쭈뼛거린 걸까? 생전 처음 보는 애들한테도 그렇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던 애가 말이야.
건넛집 수저가 몇 벌인지, 이장님 댁 누렁이가 새끼를 몇 마리 낳았는지 죄 아는 마을에 살면서도 누가 먼저 아는 척을 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남으로 지냈다. 처음 교복을 입던 그 시절의 우리는 사실 조금 유치했을지도.
“아까 현북리 내린다던 학생! 안 내려요?”
“아, 네, 감사합니다!”
미처 누르지 못한 빨간색 벨소리보다 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 논물처럼 밀려드는 그 때 그 시절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마을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는 동네에 오면 이렇게 애늙은이처럼 옛날 생각이 난다니까. 이래서 사람은 큰 동네에 살아야 돼. 은비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기억을 밀어내고는 눈을 감고도 찾아갈 그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마을 어귀, 수백년도 더 되었다는 느티나무를 지나면 나오는 파란 대문집과 빨간 벽돌집. 그 두 집 사이에는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 있었다. 어렸을 땐 왜 이렇게 이 길이 크고 넓게만 느껴졌는지 새삼 모를 일이었다.
…저렇게 최유나는 저 길이 마치 없는 것처럼 남의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말이지.
“아이구, 우리 유나 키 더 컸네?”
“에이, 저도 이제 키 클 나이는 지났죠.”
“그래? 하긴 우리 은비랑 유나랑 동갑이지? 참 세월 빨라. 내 눈에는 아직 교장 선생님 앞에서 선서하던 중학생 그대로인데.”
대문을 열기도 전에 담장을 넘어 와르르 쏟아지는 말소리에 은비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이제는 문 옆에 커다랗게 걸린 명패가 없으면 여기가 누구네 집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엄마, 나 왔어.”
“어, 은비 왔니? 마침 잘 됐다. 유나 와 있어.”
“알아. 우리 유나, 우리 유나, 아주 백 미터 밖에서도 다 들리겠어. 엄마 딸 여기 있거든?”
“질투 나?”
“질투는 무슨…”
무어라고 더 대꾸할 말을 찾던 은비는 유나를 발견하고 말끝을 흐렸다. 햇살이 깊숙이 번지는 대청마루에 엄마와 나란히 앉아 있는 건 분명 최유나였다. 예전부터 제집 드나들듯 하긴 했지만, 저렇게 익숙할 건 또 뭐람. 기다란 다리가 섬돌 위 아무렇게나 벗어둔 신발을 찾아 신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은비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
“뭘 이렇게 많이 싸들고 왔어, 무겁게.”
“얼씨구, 누가 집주인인지 모르겠어 아주.”
“자주 오는 사람이 집주인이지. 손님은 가서 푹 쉬어.”
“손님은?? 너는 뭐할 건데?”
“나는 아저씨가 같이 밤 따자고 하셔서…”
이미 제 몫으로 갖다 둔 커다란 장대를 가리키며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지 푸스스 웃어버리는 유나의 얼굴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뭐야, 이제는 나이도 안 먹어? 하여간 최유나는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아, 아니다. 무거운 짐 번쩍번쩍 잘 드는 것 하나는 좋네. 오락가락 널뛰는 은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먼저 은비의 방문을 열어젖힌 유나가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왜 놀라?”
“너 서울 가기 전이랑 완전히 똑같네.”
“당연하지, 내 방인데.”
“우리 집은 내 방 없애버렸어. 창고가 모자라서.. 부럽다.”
“부럽기는, 너도 어차피 서울 살면서.”
“그래도… 여기서 우리 겨울마다 군고구마 까먹었잖아. 진짜 맛있었는데, 그 고구마.”
“야, 너는 나랑 논 것 중에 기억 나는 게 군고구마뿐이야?”
“응?”
뼈 있는 볼멘소리에 유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리며 멀거니 은비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모양이 꼭 어릴 때 키웠던 흰둥이 같아서 그만 웃어버렸다. 착하면 뭐해, 눈치가 이렇게나 없는데. 관두자, 관둬. 최유나 때문에 내가 속 터진 게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게 정말 최유나다워서 오히려 좋았다.
갑작스러운 은비의 미소에 유나의 눈에서 영문 모를 물음표가 커져가던 그 순간, 마을이 떠나가게 울리는 은비 아버지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우리 딸 왔어? 오느라 고생했지? 여보, 뭐해! 은비 주려고 아이스크림 엄청 사다 놨잖아.”
“아빠도 참, 아이스크림은 나도 사먹을 수 있는데.”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유나도 벌써 와 있었구나? 아빠랑 유나랑 밤 따고 올 테니까 은비는 엄마랑 얘기 좀 하고 있어.”
“싫어, 나도 밤 따러 갈래.”
“응?”
“나도 밤 따러 간다구.”
“진짜?”
방송반 아나운서 출신 정은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잘못 들을 리 없는데, 아빠와 유나, 두 사람 모두 방금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시기만 되면 동네에 있는 나무마다 밤과 감이 주렁주렁 달려 동네 아이들이 모두 한 아름씩 열매를 품에 담아오곤 하지만, 유독 산을 오르는 걸 싫어하던 탓에 단 한 번도 그 무리에 낀 적이 없는 은비였다. 그런 은비가, 같이 밤을 따러 가자니.
“우리 딸이 같이 밤을 따러 간다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뭐야, 계속 놀리면 안 갈래요.”
“에이, 아빠가 너무 좋아서 그러지. 가만 있어 보자.. 장대가 또 어디 있더라?”
은비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아빠의 뒷모습에서 경쾌한 콧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아빠도 참, 그렇게나 좋을까. 그깟 밤이 뭐라고. 시장 가면 널린 게 밤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묘하게 느껴지는 유나의 시선이 은비의 얼굴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한번 의식하고 나니 함부로 눈도 깜빡일 수 없을 정도로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ㅁ, 뭐야?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너무 예뻐서?”
“은비 너 진짜 밤 따러 갈 거야?”
“이씨, 세 번 네 번 말하게 할래?”
“그럼 이렇게 가면 안 돼.”
“…!”
순식간에 유나의 허리춤에 묶여 있던 체크남방이 은비의 어깨에 둘러졌다. 생각지도 못한 유나의 행동에 은비는 이제 거의 얼어붙었다. 그러고서도 한참을 빤히 쳐다보던 유나가 이번에는 제가 쓰고 있던 모자까지 은비의 머리에 눌러 씌웠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로 유나가 제법 오랫동안 애지중지한 밀짚모자였다.
“밤송이가 얼마나 따가운데.”
은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유나가 걸쳐준 남방의 소매 끝이 은비의 작은 손을 덮고도 한 뼘 남짓이나 남았다. 최유나가 언제 이렇게 컸지. 원래 이렇게 컸나. 오늘따라 유독 올려다 보게 되는 최유나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뭐해, 안 가?”
“가고 있거든! 야, 같이 가!!”
“네가 잘 따라오면 되잖아.”
모자며 옷을 챙겨줄 때는 언제고 먼저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는 유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치사하다, 치사해. 은비는 제 것까지 2개의 장대를 양손에 그러쥐고 익숙하게 산을 향해 걷는 유나의 뒷모습을 종종거리며 좇았다. 밀짚모자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깊숙이 고쳐 쓰고서.
“은비야, 그쪽으로 밤 떨어진다!”
“으아악!”
아빠의 밤송이 공격 예고에 은비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눈을 꼭 감고 최대한 웅크리고서 툭, 하고 떨어질 밤송이를 기다렸다.
1초, 2초, 3초…
“뭐해?”
“…뭐야, 나한테 떨어진다며!”
“아저씨가 밤 따신 경력이 얼만데, 장난이지.”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이미 유나가 두 발로 커다란 갈색 밤송이를 벌려 튼실한 알밤 3개를 주워들고 있었다. 너무나도 태연한 유나의 태도며 표정 덕에 혼자 별스럽게 군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가만 보면 사람 민망하게 하는 데 뭐 있다니까.
조금 심통이 났지만, 능숙한 유나의 밤 채취 실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송이가 땅에 툭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발로 휙 뒤집어 놓고 잘 벌어진 틈을 찾아 솜씨 좋게 벌리고서는 목장갑을 낀 손으로 토실토실한 밤만 골라 내 양동이에 던져 넣는 것이 거의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우와, 완전 밤 따기 선수 같다.”
“너도 가르쳐줄까?”
“나?”
“해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아니, 너 보려고 따라온 건데. 이 말이 은비의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미 반짝거리는 까만 두 눈동자에 대고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신이 난 유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래게 몸을 움직이더니 금방 주먹만한 밤송이 두어 개를 은비 앞에 놓아주었다.
“봐봐, 이렇게 좀 벌어진 밤송이를 주워서 벌어진 쪽이 위로 오게 하는 거야. 꽉 다문 애들은 힘만 들고 알이 잘아서 쓸모가 없어. 틈새로 밤이 꽤 많이 보인다 싶으면 두 발로 한쪽씩 잡아. 그리고 나서 이렇게 더 밀어주면, 툭 하고 나와.”
“우와!”
유나가 차근차근 시범을 보이고는 은비에게 해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유나가 보여준 대로 따라하자, 순식간에 커다란 알밤 두어 개가 집을 떠나 떼굴떼굴 굴렀다. 유나가 그 중에서 가장 커다랗고 단단한 밤을 주워 은비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이거 재밌긴 재밌네.
“밤 줍는 것도 내가 할래.”
“안 돼.”
“왜!”
“가시 엄청 따가워.”
“나도 장갑 있어.”
“벌레 나온다.”
“벌레??”
“응, 엄청 크고 징그러워서 너는 보지도 못할걸.”
“농담이지?”
“보여줘?”
“이씨, 보여주면 죽는다!”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 그런 말을 하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잖아. 어렸을 때부터 최유나 장난에 속아 넘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닌 은비는 차마 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깔깔 웃는 유나가 영 마음에 안 들어 홱 돌아섰다.
“뭐야, 정은비 삐쳤어?”
“됐어, 너랑 안 놀아.”
“에이, 뭐 이런 걸로 삐치고 그러냐!”
“내 맘이거든?”
투닥투닥 다투는 두 사람의 어깨 너머로 조금씩 조금씩 해가 내려앉았다. 어느새 양동이에는 굵고 단단한 알밤이 가득 쌓였다.
영원할 것 같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리는 것은 제법 내려가는 수은주도, 붉은 나뭇잎도 아닌, 일찌감치 지평선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노을이었다. 노란 들판 위로 주홍빛 해가 길게 늘어서면 사람들은 시계를 보지 않아도 집에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알밤 원정대도 이제 허리를 펴고 제법 묵직해진 양동이를 사이 좋게 나누어 들었다. 야트막한 산인데도 벌써 땅거미가 뉘엿뉘엿 퍼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산길이 익숙하지 않은 은비는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졌다.
“내가 들까?”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무리하지 마. 아저씨 걱정하신다.”
“가끔 보면 나보다 더 우리 엄마 아빠 딸 같아.”
“우리 엄마 아빠도 너 엄청 좋아해.”
풀벌레 우는 소리, 황금빛 벼의 물결 너머로 두 사람은 도란도란 걸었다. 어스름하게 어둠이 내려앉는 밤하늘 덕에 가로등 불빛 아래 서로 길이가 다른 두 그림자가 늘어졌다. 이 시간까지 유나와 논두렁길을 걸어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땐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유나가 걸쳐준 남방과 유나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은비는 괜히 이상해지는 마음을 숨기려 양동이를 맞잡은 유나의 손만 쳐다보고 걸었다.
“예전에 기말고사 끝나고 이 길 걸었을 때 생각나?”
“언제적 얘기야, 그게.”
“그때 막 네가 나 보고 강아지풀 닮았다 그래서 엄청 삐쳐서 너 먼저 보냈다가 길 못 찾아서 새벽에 집에 들어가고 그랬는데.”
“맞아, 그래서 나도 너 올 때까지 한숨도 못 자고 너네 집에서 너 기다렸잖아. 이 동네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길을 잃어가지고…”
“비밀인데, 나 아직도 너네 집이랑 우리 집 말고는 헷갈려.”
비밀은 무슨, 이 세상에 너만 빼고 다 알걸? 은비는 하마터면 입 밖으로 뱉을 뻔한 말을 꾹꾹 삼켰다.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정말 단단히 삐쳐서 혼자 양손 가득 밤을 들고서 아무 길로나 걸어가버릴 테니까. 사실 은비는 이 좁은 동네 역사를 통틀어 가장 길을 많이 잃은 게 최유나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신이 난 유나는 몇 년 전 이야기 보따리를 마치 어제 일처럼 술술 풀어놓았다. 쌀맛이 궁금하다며 초록색 벼를 훑어다 씹었다가 어금니가 나갈 뻔했던 것부터, 새참을 나르다 호기심에 마신 막걸리 두 잔에 얼굴이 발개져 동네 어른들에게 된통 혼났던 날, 시험이 끝나고 버스가 다 끊기도록 놀다가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겨우 택시를 타고 돌아온 날까지.
“맞아, 그날 한 달 모은 용돈 다 썼잖아 우리.”
“그날 이후로 집 올 때 택시 절대 안 타.
“나도. 무조건 버스. 근데 몇 년 안 된 거 같은데 왜 이렇게 옛날 얘기 같지?”
“너 되게 오랜만이잖아, 시골집.”
“바빠서 그렇지 뭐. 유나 너는 자주 와?”
“그냥 뭐.. 올 때마다 매일 너네 집 가서 너 오나 안 오나 기다리고 그랬는데.”
“진짜?”
“진짜.”
“뭐야, 그럼 연락을 하지 그랬어. 너 내 연락처도 알잖아.”
“…”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사실은 맞잡은 손 끝까지 떨림이 전해질까 봐 걱정될 정도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유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조곤조곤 잘만 말하더니,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저 빙그레 웃을 뿐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돌이켜 보면 최유나는 정은비한테 아는 척만 못한 게 아니었다. 딱 한 걸음, 그 만큼만 더 오면 되는데. 매일 기다렸다는 말에 자꾸만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사람 마음도 모르고.
내가 다시는, 다시는 최유나 때문에 여기 오나 봐라. 은비는 그런 다짐을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유나 오늘 고생 많았다.”
“아니에요, 아저씨가 더 고생하셨죠.”
“이건 유나 몫으로 가져가고, 내일 놀러오면 또 맛있게 구워줄게. 알았지?”
“네!”
“조심해서 들어가.”
“정은비, 잠시만.”
“…?”
이대로 끝인 줄만 알았던 오늘 하루가, 유나의 손이 은비의 팔을 붙잡은 순간 그대로 멈추었다. 눈이 동그래진 은비의 팔을 유나가 조금 더 제 쪽으로 당겼다. 잠깐이면 돼. 잠시 망설이던 은비는 이미 집 안으로 반쯤 들여놓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하늘은 까맣게 물들었지만 어차피 둘 사이에는 길 하나가 전부였다.
대문 앞 노란 가로등 아래 덩그러니 두 사람만 남았다. 기세 좋게 은비를 돌려세울 때는 언제고 유나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찾느라 분주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엽기는 했지만, 아직 꽁한 마음이 다 풀리지 않은 은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색한 침묵을 이겨내지 못하고 괜히 발 끝으로 땅바닥만 툭툭 치고 있는데 눈앞에 난데없이 유나의 손이 활짝 펼쳐졌다.
“…?”
“너 닮았더라. 가져.”
커다란 유나의 손바닥 위에 놓인 건 작지만 반질반질하고 단단한 밤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흙을 털고 문질러댔는지 그 작은 알밤이 윤기가 자르르 돌았다. 끝까지 마음이 상한 티를 내려고 했는데, 제법 의기양양한 유나의 표정에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너 이거 작다고 나 닮았다고 그러는 거지.”
“아니, 아, 그것도 맞긴 한데…”
“뭐?”
“맨들맨들하고 예쁘길래.”
은비는 그제서야 이 말을 들으려고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이 밤을 내밀기 위해 유나가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도. 좀 더 번드르르하고 멋진 말도 많겠지만, 이게 최유나 스타일이라면, 그러면 좋았다. 자꾸만 마음이 간질간질해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조심해서 들어가.”
“그럼, 이제 화 풀린 거지?”
“화? 나 화 안 났는데?”
화라니? 그게 뭔데? 은비는 방금 전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뾰로통한 얼굴로 유나를 흘겼던 건 모두 없었던 일인 양 환하게 웃어주었다. 아무리 봐도 화가 났던 것 같은데… 영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나는 교복을 입었던 그때 그 시절의 최유나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눈이 마주치고도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알은체도 하지 못하던 최유나.
있잖아 유나야, 사실 나는 너를 되게 오랫동안 기다려 왔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은비는 손을 뻗어 유나의 손을 잡았다.
“아, 맞다.”
“응?”
“이거, 네 옷…”
“다음에 줘.”
“다음에?”
“응.”
다음을 기약하는 유나의 눈동자에 동그란 달이 두 개 떴다. 커다랗고 하얀 보름달이었다. 은비는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네 집인지 모를 담장 너머로 고소한, 밤 굽는 냄새가 퍼졌다. 무르익은 가을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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