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선풍기가 쉬지 않고 부지런히 돌아가는 자취방 창문 너머로 매미가 커다란 목청을 뽐내며 우는 소리가 넘어다녔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풀이 이제는 푸르다 못해 잎마다 까만 빛이 돌 정도로 진해진 여름의 어느 주말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난 예린은 찬물로 세수를 마치자마자 주방 찬장을 열었다. 엊그제 본 요리 유투브에 감명을 받아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비빔면을 끓일 예정이었다. 크기는 작지만 접시며 조리도구가 알차게 정돈되어 있는 주방에 노란색 앞치마까지 갖춰 입고 있는 모습이 제법 그럴 듯했다. 이게 바로 요리왕 XX님의 레시피라 이거지. 좋아, 오늘은 내가 비빔면 요리사!
우선 물 600ml를 먼저 끓이고, 면을 넣는다. 물이 보글보글 끓는 동안 지난 주에 깨끗이 소독해 둔 도마를 꺼내 들었다. 이미 씻어둔 오이를 잘게 채 써는 경쾌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일정한 크기와 간격으로 썰어 둔 오이를 따로 그릇에 담고 나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거품을 걷어냈다. 정확히 3분으로 맞춰둔 스톱워치가 요란하게 울리자마자 뜨거운 물은 체로 걸러내고 얼음을 가득 담은 보울에 면을 쏟았다. 소금을 조금 넣고 물을 반쯤 부어 삶고 있는 계란도 이쯤 되면 약간 완숙이 될까 말까 한 정도로 익었을 때였다. 비닐을 뜯자마자 강렬하게 코를 찌르는 비빔면 양념장의 새콤한 향 때문에 저절로 침이 고일 정도였다. 예린은 자기도 모르게 볼에 보조개가 움푹 파이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먹어볼까나?
기다란 나무젓가락을 꺼내 들고 예쁘게 돌돌 만 면을 면기(麵器)에 담았다. 이제 저 계란만 까면… 아, 깜짝이야. 분명 무음으로 해뒀다고 생각했는데, 천둥이 치는 것처럼 벨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액정화면에 뜬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한 예린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은비?”
“언니 뭐해요?”
“나?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나 영화 보고 싶은데 나와요.”
“몇 시 영화인데?”
“2시 반이요.”
예린은 재빨리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우드 LED 조명 시계를 훔쳐보았다. 오후 1시 반, 준비하고 나가기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채 썬 오이와 삶은 계란과 돌돌 말린 면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던 예린은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 2시 15분까지 갈게.”
영화관에 도착하자마자 예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끝도 없이 가득 들어찬 사람들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이 날씨에 실내에서 무언가를 하기에 영화관만큼 쉬운 선택지는 없을 테니까. 이래서 주말에는 집 밖으로 나오기가 싫었는데. 아주 잠깐 그런 후회를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머리와 달리 예린의 두 눈은 은비를 찾아 헤맸다. 쪼만해서 보이기는 하려나. 아냐, 그래도 그렇게 귀여운 애가 세상에 많지는 않잖아. 추운 걸 싫어하니까 아마도 저기쯤에… 찾았다.
“정은비 오늘 예쁘게 하고 나왔다? 저녁에 약속 있어?”
“뭐예요, 느끼하게. 제가 영화표 샀으니까 팝콘은 언니가 사요.”
“오리지널?”
“카라멜이요.”
곧 시작하는 영화 시간에 맞추려면 빠듯했지만 예린은 군말없이 길게 늘어선 팝콘 줄에 자리를 잡았다. 군것질을 좋아하는 은비에게 영화관에서 먹는 팝콘이 없다면 영화 자체가 완성이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제 상식이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XXXX 콤보 주세요. 팝콘은 카라멜로요.”
어차피 다 마시지도 못할 거 음료도 하나만 시키면 훨씬 들고 다니기도 편할 텐데. 항상 메뉴판을 보며 하는 고민이었지만, 한 컵에 빨대 두 개를 꽂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언제나 똑같은 선택을 하곤 했다. 결국 오늘도 커다란 팝콘 하나에 음료 2개를 들고 다니는 건 예린의 몫이었다.
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잘생기지도 않은 배우가 자꾸 잘생긴 척을 하고, 가끔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별거 아닌 농담을 던지면 은비가 웃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여자 주인공이 예쁘긴 했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행동이나 대사는 하나도 없었다. 어제 조별과제 피피티를 혼자 다 수정하느라 밤을 꼴딱 새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정은비가 불러낸다고 오늘 하루 계획을 다 엎어버리고 허둥지둥 나온 게 문제였는지도 모르지. 원래 이 시간에는 빨래를 돌리려고 했는데…
예린은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고 졸리지 않을 만한 주제를 생각해 냈다. 가스불은 끄고 나왔나? 멀티탭 전원은 다 껐나? 면 다 불었을 텐데 제대로 넣어놓고 나올걸. 팝콘이라도 씹어먹으면 좀 나을까 싶어 반쯤 비어 있는 팝콘통에 손을 넣는 순간, 잡히라는 팝콘은 잡히지 않고 손에 닿는 말랑말랑한 촉감이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미, 미안.”
“졸리면 자도 돼요.”
“내가? 아냐, 나 완전 하나도 안 졸리지.”
소곤소곤 속삭이는 은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한 걸 느낀 예린은 과장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잠은 다 달아나버린 지 오래지만 마치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팝콘을 입 안 가득 넣고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누가 팝콘을 그렇게 먹어요. 은비는 양볼이 터지도록 팝콘을 우물거리는 예린을 보며 한참을 키득키득 웃고는 제 몫의 팝콘을 집어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두운 영화관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마 밖에서 보았더라면 얼굴이 새빨개졌을 게 분명했다.
“아, 재미 있었다.”
“거짓말.”
“진짜야. 올 하반기에 나온 영화 중에 최고.”
“아직 하반기 시작한지 한 달도 안 됐잖아요.”
“그런가?”
여름 해는 뜨겁고도 길어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환하고 밝았다. 은비의 동글동글한 코 위로 저 햇볕이 닿으면 더 동글동글해지는 거 아닐까. 예린은 실없이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이 언니 또 아무 소리나 하네. 은비는 분명 그런 표정이었지만 예린이 해맑게 웃는 게 웃겼는지 같이 따라 웃었다.
“너 왜 자꾸 웃어? 내가 웃겨? 하긴 내가 좀 예쁘게 웃긴 하지.”
“에이, 에바.”
“언니한테 에바가 뭐야, 에바가.”
“에바입니다.”
“됐다, 됐어.”
이런 대화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왠지 은비 앞에만 서면 이상한 소리만 하게 되는 건 왜일까? 이래가지고는 언니로서의 위엄 같은 건 바닥을 치게 생겼는데. 예린은 고민에 빠졌다가, 이내 생각을 그만두었다. 뭐, 어때. 은비가 재미 있기만 하면 되지.
영화는 끝이 났고, 이제는 선택의 순간이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지도 보듯 훤한 동네인 만큼 마음만 먹으면 요앞에 맛있는 빙수를 먹으러 가자고, 아니면 이 주변에서 가장 예쁜 알바가 있는 카페에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러 가자고도 할 수 있었다. 사실은 은비랑 가고 싶어서 찾아본 펍이 여기서 걸어서 5분 거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겨우 열린 예린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어디로 가? 걔 오늘 알바해?”
“네, 근데 방금 끝났다고 신논현역 쪽으로 오래요.”
“가자, 데려다 줄게.”
아까 한달음에 뛰어올 때는 몰랐는데 오늘 되게 더운 날이구나. 예린은 녹아내릴 것 같은 길거리를 걸으며 그제서야 더위를 알았다. 이래서 이번 주말에는 집에 틀어박혀서 지내려고 했는데, 인생은 항상 제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하긴 인생이 계획한 대로만 굴러가는 거였다면 이렇게 정은비를 보고 싶어 하게 되지도 않았을걸. 예린은 은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더워요?”
“아니? 완전 시원하지. 이거 아이스 쿨링 어쩌고 소재야.”
“그럼 지금 언니 이마에서 나고 있는 건 눈물이에요?”
“그러는 너는? 너도 엄청 더워보이거든?”
“어쩔 수 없잖아요! 데이트 하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 된다구요.”
“네, 네, 행복한 연애하세요.”
으, 진짜 이런 날씨 너무 싫어. 빨리 집 가서 시원한 물로 씻고 선풍기 켜놓고 싶다. 저 멀리 신논현역이 보이기 시작하는 게 예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지.
“언니.”
“왜. 덥다, 빨리 가자.”
“이거 선물이에요.”
“나? 진짜 나 주는 거야?”
“여기 언니 말고 또 누가 있어요?”
“아니, 그렇긴 한데..”
“아까 언니 기다리면서 구경하다가 이거 보자마자 샀어요. 노란색 좋아하잖아요.”
“맞아. 나 완전 좋아하지.”
“더운데 나와줘서 고마워요. 맨날 내가 영화 보자고 하면 같이 봐주는 것도. 다음에도 같이 놀아줄 거죠?”
예린은 얼떨결에 은비가 건네는 휴대용 선풍기를 받아들었다. 샛노란 손풍기에는 은비의 글씨체로 작지만 분명하게 YR이라고 이름까지 써 붙여져 있었다. 참나, 내가 이런 걸로 넘어갈 줄 알아? 나 쉬운 사람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예린은 헤벌쭉 웃어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내용의 영화든 상관 없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처음 은비가 제목을 말해주었을 때부터 예린은 이 영화가 제 취향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다. 영화관에 걸린 영화는 웬만하면 다 보고 싶어하는 은비에게 바쁜 그 사람 대신 같이 영화를 봐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도.
그치만 괜찮아. 서로 다른 마음이라도, 언제든 불러줘. 예린은 은비의 뒷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시 식탁 앞에 앉았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때였다. 먹음직스럽게 익었던 면은 영화 러닝타임이 지나는 동안 다 불어버렸다. 사실 이건 더 이상 면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팝콘 조금과 콜라 몇 모금을 마신 게 다인 사람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예린은 과감하게 젓가락을 집어들고 양념장과 오이와 면을 한데 뒤섞었다. 눈 딱 감고 한 입, 아니 한 덩어리를 삼켰다. 으, 체할 거 같아.
분명 천만명의 선택, 최고의 레시피랬는데. 요리왕 XX 거짓말쟁이. 예린은 애꿎은 유투버를 원망하며 눈물을 머금고 이제는 면인지 덩어리인지 알 수 없게 된 그 무언가를 음식물쓰레기 봉투에 쏟았다. 개수대에 산처럼 쌓여 있는 냄비와 그릇만이 예린을 반겨 주었다.
에라, 모르겠다. 예린은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했다. 그러니까, 설거지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베개 옆에 놓아둔 노란색 병아리 인형 옆에는 은비가 준 노란색 손풍기가 마치 원래 제자리였던 것처럼 놓여있었다. 한참 그 손풍기를 쳐다보던 예린은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조금 졸리고, 많이 지쳤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X이버 앱을 열고 영화 리뷰 칸을 찾았다. 은비와 영화를 보고 오면 꼭 하던 일이었다.
-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재미는 없지만요.
다음에 만날 땐 펍에 가자고 해야지. 밤샐 거니까 다른 약속 잡지 말라고, 맥주도 마시고 같이 산책도 하자고. 진짜로 그럴 거야. 정은비 각오해라. 그땐 절대로 안 보내. 벌써 한 열번쯤 했던 다짐을, 예린은 오늘도 또 한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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