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이제 우리는 문과와 이과가 통합되고 통합을 기치로 내건 정당이 수도 없이 생겼다 없어지는 대통합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는 여전히 절대 섞여서는 안 될 존재가 있다. 이를테면 물과 기름, 하늘과 땅, 그리고 해와 달 같은, 그런 것들 말이지. 하지만 간혹,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질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 소식은 메마른 땅에 스며드는 빗물처럼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퍼지며 학교 전체를 뒤집어 놓았다.
“야, 그거 들었어?”
“대박. 말도 안 돼.”
“그거 완전 구라래. 개뻥이라던데.”
“그런 말 하고 다녔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는 거 아니야? 조심해.”
“하지만,”
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 두 사람이 이 더위에 깍지 끼고 손 맞잡고 걸어가는 거.
2학년
w. whatUsee
학교에 흉흉한 괴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아마 1학기 중순쯤부터일 것이다. 아무도 이 소문이 어디서 어떻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는 몰라도, 기말고사가 끝난 날에는 거의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쉬쉬하면서도 하굣길 가벼운 책가방을 멘 아이들은 열이면 열 그 얘기를 꺼내지 않고는 못 배겼다.
“무슨 소리야, 네가 직접 봤다고?”
“이거 구라면 알지. 바로 응징 간다.”
“신라호텔 애플망고빙수 걸고 진짜야.”
“뭐? 신라호텔?”
밑도 끝도 없이 무슨 금 뿌린 빙수 얘길 하고 있어. 얘 이거 또 허언증 시작이구나. 잔뜩 흥미로운 눈으로 둥글게 모여들었던 아이들은 역시 뻥일 줄 알았다며 혀를 쯧쯧 차고 다시 멀어졌다. 안 그래도 요즘엔 여름 해의 열기가 뜨거워 모든 것에 흥미를 금방 잃곤 했다. 누군가 툭 하고 내찬 발길질에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 공원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더위에 지친 열두어개의 눈동자가 무심코 돌멩이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차였다.
“야, 어떡해. 진짜인가 봐.”
일순간 크고 작은 아이들 모두 입을 가리고 숨을 멈추었다.
학교 앞 공원, 낡은 나무 벤치에서 정은비가 최유나의 목에 팔을 걸고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도 꽤 진하게.
정은비와 최유나. 이건 물과 기름, 하늘과 땅, 해와 달보다 더 이질적이고 동떨어진 2개의 세상이었다. 매일 교실 맨 뒤에 앉아 눈을 감거나 엎드려 있다가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그 소동의 주인공을 빤히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를 울려버리는 정은비와 학교 대표로 받은 상장만 적어도 전지 한 장이 부족해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은 물론, 살면서 반장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다는 최유나. 그 두 사람에게 접점이 있다면 같은 나이, 같은 학년, 같은 학교인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아, 닿은 게 또 하나 있구나. 입술.
두 사람이 당돌하게도 교복을 입고 모두가 등하굣길에 지나다니는 학교 앞 공원에서 키스했다는 소문은 방학식을 코앞에 둔 무료한 학교에 들불처럼 번졌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고 누군가는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그 장면에 대해 듣거나 보았다면 결국 한마음으로 이렇게 외치고야 말았다.
“대체 왜?”
왜, 라는 건 엄밀히 말하면 두 사람 모두에게 그 행동에 대한 이유를 묻는 거겠지만, 실제로 질문의 화살이 쏠린 곳은 최유나 쪽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즉, 최유나 네가 왜? 에 좀 더 가깝다고나 할까.
그도 그럴 것이 최유나 좋다는 애들은 언제나 교실 한 칸을 채울 정도로 넘쳤고, 그 애들 눈에 비친 최유나는 정은비와 어울리지 않았다. 교복 한 번 줄여 입은 적이 없는 최유나가 교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온 적이 별로 없는 정은비를 만난다는 건 마른 하늘에 날벼락, 경천동지나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이 사건에 대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던 일부 무리를 중심으로 음모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최유나가 협박을 당하고 있다더라, 정은비가 최유나 약점을 쥐고 흔든다던데, 방학 때까지만 계약연애하기로 한 거라며? 등등 방학을 앞둔 열여덟살짜리들의 상상력은 끝간 데 모르고 튀었다. 간혹 조금 점잖은 축에 속하는 아이들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에이, 이런 말은 좀… 이라며 불을 껐지만, 기말고사까지 끝나버린 마른 풀밭에 번진 불이 쉬이 잠재워질 리 없었다.
사건의 진상은 뭘까. 온갖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모두 가장 궁금해하는 건 두 사람의 관계였다. 그래서, 둘은 무슨 사인데? 대개 인간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때부터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종족이었다. 결국 개중 좀 더 용기 있는 누군가 육상부 클럽활동이 끝난 최유나의 앞길을 막아서고야 말았다.
“있잖아, 유나야.”
“응?”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너, 정은비한테 약점 잡힌 거 있어?”
“정은비? 약점?”
이제 겨우 가쁜 숨을 고르며 신발에 묻은 흙을 털던 유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금 들은 2개의 단어를 곱씹었다. 질문을 던진 아이는 그 얼굴만 보고도 방금 그 질문이 얼마나 부적절했는지 단번에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게…”
“내가 제대로 들은 거야? 정은비한테 약점 잡혔냐구?”
“어, 그러니까,”
“나 걔랑 사귀는데?”
드디어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갈라지고야 마는 순간이었다.
최유나가 한 문장으로 학교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그 순간, 은비는 집안 거실 쇼파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며 만화책을 팔락팔락 넘기고 있었다. 요즘에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웹툰을 보는 게 훨씬 더 보편적이지만, 아날로그적인 누구 때문에 직접 요 앞 만화카페에서 빌려온 시리즈였다. 생각보다는 재밌네. 이 더위에 나갔다 올 정도는 아니지만. 은비는 갑자기 아까 흘린 땀방울이 생각나 깊은 한숨을 쉬었다. 생긴 것도 곱상하고 수려하게 생겨 가지고, 정말 자기가 조선시대 선비냐구, 참 나.
그러고 보니 여름 더위에 정신을 못 차리는 그 선비가 이제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시간을 확인하려 만화책에서 눈을 뗀 은비는 그제서야 휴대폰에 수도 없는 알림이 떠 있는 걸 발견했다. 부재중전화 16건, 메신저 알림 300+. 이게 대체 무슨 일인데? 태생적으로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은비의 삶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최유나랑 사귀는 거 트루?
- 유나한테 들었어
- 진실이 뭐야
- 솔직하게 말해줘 우리 유나랑 사귀는 거야?
뭐? 우리 유나? 동그랗던 은비의 입가에 뾰족하고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누가 누구 보고 우리 유나래. 은비는 휴대폰 갤러리를 휙휙 넘겨 유나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찍은 셀카를 찾아 상대에게 보냈다. 차단 버튼을 누르는 것 역시 잊지 않고서. 하여간 최유나 주변 애들은 예나 지금이나 꽤나 성가시게 굴었다.
물론 그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건 최유나 본인이다.
그렇게 누누이 얘기를 하는데도 사람 좋은 미소를 여기저기 날리고 다니니까 각다귀 떼가 윙윙 꼬이는 거 아니야. 대체 오늘 무슨 사고를 친 건지는 몰라도,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런 연락 받는 건 딱 질색이라고.
에어컨 바람이 적당히 실내온도와 은비의 혈압을 낮춰주었을 때쯤 삑,삑 하고 도어락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났다. 하도 들락날락해서, 전교에서 유명한 길치인 유나가 지도를 보지 않고도 찾아올 수 있는 유일한 남의 집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부지게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최유나답게 성급하게 신발을 벗는 소리가 들리자 은비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나 왔어.”
“응, 여기 얼음물 떠놨어.”
“역시, 정은비 최고.”
“밖에 너무 덥지 않았어?”
“완전. 오늘은 2바퀴 밖에 못 뛰었어.”
“그러니까 여름엔 클럽활동 하지 말라니깐.”
“그래도 어떻게 빼먹어.”
“네, 네, 반장 말이 다 맞아요.”
은비는 종합 비타민 한 알을 꺼내 유나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유나가 물과 함께 알약을 삼키고 있으면 한쪽만 멘 가방에 지난번에 놓고 간 노트를 넣어주는 것 역시 은비의 몫이었다. 며칠 전에는 틴트를, 엊그제는 노트를, 이쯤 되면 놀러 오려고 일부러 놓고 다니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은비네 집에는 유나의 물건이 차곡차곡 쌓였다.
“우리 정은비 학생은 오늘 몇 걸음이나 걸었어요? 운동하기로 했잖아.”
“어, 유나 너 뭔가 교복이 조금 짧아진 것 같은데?”
“말 돌리지 말고.”
“들켰어? 근데 진짜 좀 짧아졌어.”
“맞아, 엄마도 짧아졌다고 새로 사줄까 하시더라. 은비는 어떻게 알았어?”
“뭐, 그거야… 우리 작년에 같이 교복 맞췄잖아.”
아무한테도 보여주기 싫은 최유나 복근이 보일 듯 말 듯한 게 너무 신경 쓰여서, 라고 대답하면 안 되겠지. 은비는 간신히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고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아직도 키가 크고 있다는 데 들뜬 최유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어제 재보니까 169센티미터 나오더라. 우리 키 차이 더 벌어졌다?”
“아 그래? 좋겠다?”
“아랫공기는 좀 어때?”
“흥, 나는 체구가 아담해서 안기 좋잖아.”
“맞아.”
“…와, 오늘 되게 덥다.”
본격적으로 키가 안 맞네, 눈높이가 안 맞네 등등 시동을 걸 줄 알았는데 어쩐 일로 유나가 고분고분 인정하는 바람에 은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타이밍에, 이 멘트에 순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면 어떡해?
맨날 나 놀릴 궁리만 하고 사는 애처럼 놀려먹을 때는 언제고, 대놓고 놀리라고 판을 깔아주면 꼭 이런 식이지. 고2 정은비 인생에 연애라면 해볼 만큼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최유나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점이 더 마음에 드는 거지만.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되게 이상한 일이 있었어.”
“뭔데?”
“2반에 수정이라고 알아?”
“어, 대충.”
“걔가 갑자기 내가 너한테 약점 잡힌 게 있냐는 거야. 무슨 소리냐고, 나 은비랑 사귄다고 했더니 제대로 말도 안 해주고 가더라?”
“하, 그래서였어?”
“뭐야, 은비 너도 알아? 나 뭐 잘못한 거야?”
“아냐, 우리 유나가 잘못한 게 어딨어. 하나도 없어.
“그치?”
“앞으로 누가 또 이상한 소리 하면 나한테 데려와.”
일의 전말을 이제서야 알게 된 은비는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무슨 수정이더라, 작년에 최유나 주변에 알짱거리다가 눈물 쏙 빼고 한동안 안 보이던 걔. 요즘 뒤에서 쑥덕거리는 애들이 많다 싶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저돌적이네. 우리 애 데려다가 이상한 질문이나 하고 말이야. 내 뒤에서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지만, 우리 유나 괴롭히는 건 못 참아.
아니 근데, 최유나를 건드려? 어딜 감히. 생각할수록 열 받네. 은비는 홧김에 유나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말랑말랑한 팔에 닿는 단단한 촉감이 썩 마음에 들었다.
사실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별로 궁금하지도,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이건 간지럽지도 않은 시기와 질투일 뿐이었다. 엊그제 층을 적당히 내어 자른 까만 머리카락부터 만화책을 발견하고 반짝거리는 눈동자, 단정한 입매, 길쭉길쭉한 팔다리, 그리고 남들이 모르는 크고 작은 점과 선까지도, 최유나의 모든 것들은 다 정은비만의 것이니까. 남들은 얼씬도 할 수 없단 말이야.
“유나야, 그럼 이제 공개연애 하기로 한 거야?”
“응? 우리 숨기고 있었던 거야??”
오히려 놀란 듯한 유나의 반문에 은비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이렇게나 무던하고 눈치 없는 여자친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래가지고는 단단히 한 마디 할 수도 없잖아. 조금은 꽁했던 마음이 유나의 질문 하나에 한여름 낮, 손에 든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았다. 아무래도 정은비는 최유나한테 더 오래오래 빠져 있을 모양이었다.
“나랑 약속 하나만 해.”
“응? 무슨 약속?”
“방학 땐 다른 애들이랑 연락 금지.”
“나 비상연락망 확인해야 되는데..”
“그런 거 말고, 이 바보야.”
“뭐? 바보?”
“지금 그 단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닌데, 완전 중요한데.”
“그래서, 약속 안 할 거야?”
은비는 일부러 눈에 매섭게 힘을 주고 유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러면 다른 애들은 엄청 무서워하던데.
하지만 이미 바보라고 불린 게 불만인 유나의 뾰로통한 얼굴을 보자마자 은비는 이 작전이 실패라는 걸 알았다. 언제 어디서나 의젓하고 씩씩한 최유나는 어디 가고, 눈앞에는 산책 며칠 못 나간 것 같이 삐진 커다란 강아지만 남아 있었다. 참나, 항상 이렇게 삐지는 건 최유나고 어르고 달래는 건 나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은비 역시 앙칼지게 다문 입술이 자꾸만 위로 당겼다.
“최유나 삐졌어?”
“아니? 안 삐졌는데?”
“얼굴 보니까 삐졌는데?”
“안 삐졌거든?”
“그럼 나한테 뽀뽀해봐.”
누가 봐도 삐진 얼굴이지만, 삐졌다고 인정하기에는 최유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겠지. 이건 무조건 정은비가 이기는 게임이었다. 사실은 언제나 그랬다. 얼음물을 머금었던 차가운 입술이 동그란 볼에 닿았다.
“됐지?”
“응. 근데, 유나야.”
“응?”
“뽀뽀만 할 거야?”
나른한 은비의 말투에 유나의 작은 귀가 새빨개졌다. 완전히 여유를 찾은 은비와 달리, 이제 급해진 건 유나 쪽이었다. 한여름 열두시의 해보다 더 뜨거운 입술과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입술이 맞부딪혔다. N극과 S극이 붙은 것 같은 열여덟의 연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