윶읂(구칠즈)/연작&연재

스무 살의 어느 여름에 下

whatUsee 2020. 4. 27. 00:13

 

 

 

 

 

 

올 여름에는 비다운 비가 한번도 내리지 않았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빛에 복숭아와 고추는 붉게 익었지만, 동네 강아지들은 맥을 추지 못하고 느티나무 그늘에 널브러져 있곤 했다. 더위라면 질색인 은비도 해가 뜨겁게 땅을 달구는 시간에는 마루에 누워 덜덜거리는 선풍기 바람을 쐬는 것 외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직 단 하나, 매미 우는 소리만 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커졌다.

 

 

 

 

 

하지만 그 무더운 더위도, 매미소리도 이장님 댁에서 울려 퍼지는 호통소리를 이기지는 못했다.

 

 

 

 

 

 “뭐? 여기 남고 싶다고?”

 “아버지, 제 말은..”

 “당장 다음 주에 올라가!”

 

 

 

 

 

 

대답을 하는 유나의 목소리는 점점 더 사그라들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저씨의 노기 어린 목소리만으로도 대강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짐작할 만했다.

 

마루에 얼굴을 찰싹 붙이고 있던 은비는 선풍기를 들어 방으로 옮겼다. 제가 다 들었다는 걸 알면 유나가 속상해 할 것 같아서. 문득 벽에 붙여 둔 종이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두꺼웠던 8월도 이제 몇 장 남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엄마는 여기서 한 장을 찢어냈다. 은비와 유나의 여름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한참이나 시끄럽던 이장님 댁이 조용해지자 마을은 고요했다. 이때다 싶어 낮잠을 자려고 누웠지만, 어쩐지 자꾸만 유나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을 어지럽혔다. 은비는 가만히 눈을 감고 항상 웃고 있거나 수줍어하던 유나의 얼굴을, 그 까만 눈동자를 떠올렸다. 잔뜩 혼이 난 너는 어떤 마음일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지금 너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은비는 제 입술을 쳐다보던 유나의 시선이 생각나 더웠다. 언제나 유나는 은비를 올곧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은비는 그런 유나를 자꾸만 자꾸만 생각했다.

 

그런 유나가, 곧 떠난다. 떠나고 싶어하지 않아 하지만 떠나고야 말 것이다. 그럼 유나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뻐꾸기 시계가 두 번을 울었다. 오후 2시라는 뜻이었다.

 

 

 

오래오래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던 은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장 아끼는 아디다스 츄리닝으로 갈아입었다. 서울에 사는 이모가 보내준 옷이었다. 차가운 물로 세수도 다시 하고 거울을 보고 여러 번 입술 색을 고쳤다. 조금 있으면 유나가 복숭아밭으로 새참을 나르러 갈 시간이었다.

 

 

 

 

 

 

 

 

 “어..?”

 

 

 

 

 

낑낑거리며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초록색 자전거를 끌고 나오던 유나가 은비를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자전거 앞에 꽉 동여맨 바구니에는 주먹밥, 찰떡, 감자와 옥수수, 막걸리 같은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매일 이 시간쯤 유나가 성실하게 배달하는 새참과 주전부리였다.

 

 

 

 

 

 “뭐야, 왜 놀라? 나 만나서 싫어?”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예쁘다, 은비야.”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유나를 놀릴 준비를 잔뜩 하고 있던 은비는 사르르 팔짱을 풀었다. 유나는 단 한 번도 숨기거나 돌려 말할 줄을 몰랐다.

 

 

 

 

 

 

 

 

 

 

 

 

 

낡은 자전거는 기름칠이 제대로 되지 않아 조금 삐걱거렸지만, 유나는 전혀 흔들림 없이 앞으로 페달을 밟아 나갔다. 가끔씩 은비가 잘 앉아 있는지, 불편한 건 없는지 확인하려고 뒤를 쳐다보았지만 그때마다 은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유나의 허리춤을 붙잡은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을 태우고 시골길을 달리는 자전거는 제법 시원한 바람을 일으켰지만 왠지 은비의 얼굴은 쉽게 식지 않았다.

 

 

 

 

 

 

페달을 밟아 도착한 복숭아밭은 저 멀리서부터 제철을 맞은 하얗고 붉은 과일의 향으로 가득했다.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연신 씻어내던 사람들은 유나와 은비를 두 팔 벌려 반겼다. 특히 은비의 부모님은 은비를 발견하고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딸 아니야?”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우리 은비가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ㄴ,나도 엄마 아빠 보러 올 수도 있지!”

 “엄마 아빠 보러 온 거 맞아?”

 “이젠 와도 뭐라고 하고, 너무해.”

 

 

 

 

 

은비의 뾰로통한 대꾸에 모두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잔뜩 토라진 은비는 조금 심술이 났지만, 사람들 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유나를 보고 어쩔 수 없이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복숭아도 실컷 먹고 가라며 손을 이끄는 어른들한테 못 이기는 척 유나와 함께 복숭아도 여러 개 땄다. 유나가 내미는 농밀하고 달짝지근한 복숭아를 받아 들었을 때에는 조금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손과 손이 닿았을 때 마주친 유나의 눈빛이 달았다.

 

 

 

 

 

 

이제 바구니에는 복숭아 몇 개와 빈 주전자만 남았다. 유나는 은비가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 가도 된다는 은비의 말에 받침대를 툭 발로 차 놓고도 금방 출발하지는 않았다.

 

 

 

 

 

 “왜 출발 안 해?”

 “은비야, 손 줘 봐.”

 “…?”

 “꽉 잡아.”

 

 

 

 

 

얼떨결에 내민 두 손을 단단히 붙든 유나가 제 허리에 은비의 팔을 둘렀다. 두 사람 사이에 조금의 빈틈도 없이 자전거가 달리기 시작했다. 유나의 등이 이렇게 따뜻하고 단단하다는 것을 은비는 처음 알았다. 덜컹거리는 시골길을 핑계로 은비는 유나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눈을 감으면 자전거가 움직이는 소리, 바람, 그리고 유나의 숨소리만 들렸다.

 

 

 

 

 

 

 

 

 

 

 

 

 

 

 

초록 자전거는 두 사람의 집도, 다른 복숭아 밭도 아닌 어느 낡은 오두막에서 멈췄다.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뒤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다. 아무 설명도 없었지만, 큰 결심을 한 것 같은 유나의 눈만 보아도 은비는 알 수 있었다. 여기는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없이, 오롯이 유나 혼자 마음을 정리해야 할 때면 찾아왔던 곳이라는 것을.

 

 

 

 

 

 “초대해 주는 거야? 이런 데가 있는지 몰랐네.”

 “어렸을 때 할아버지랑 왔던 곳이야. 이제 할아버지는 무릎이 아프셔서 여기까지 못 오시지만..”

 

 

 

 

 

유나가 신문지를 펴 은비가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붙어 앉은 채 개울물이 흐르는 것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한참 자전거 페달을 밟아서인지 유나의 몸에서는 열기가 쉽게 가시지 않았고, 은비는 그게 싫지 않았다.

 

 

 

 

 

 “오늘 어쩐 일로 나온 거야? 더우면 안 나오잖아.”

 “엄마 아빠 보러 왔다니까.”

 “아..”

 

 

 

 

 

조금 시무룩해지는 유나의 표정을 보고 은비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좀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오늘 아침에 이장님 댁에서 났던 큰소리를 떠올리고 선심을 쓰기로 했다.

 

 

 

 

 

 “바보야, 너 보러 온 거야.”

 “응?”

 “아까, 들었어. 너 혼나는 거. 혼자 속상해 하고 있을까 봐 보러 왔어.”

 “다 들었어?”

 “다는 아니고, 조금.. 자꾸 빨리 가라셔?”

 

 

 

 

 

유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서울 얘기만 나오면 유나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이제는 은비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유나가 욕심이 없어서 배부른 소리나 하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별로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유나의 곁에 그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은비는 말 없이 유나의 등을 토닥였다.

 

 

 

 

 

 “여기서 살겠다는 게 내 욕심일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

 “아버지는, 아니 마을 사람 모두가 그래. 서울에 가서 아버지가 못한 일들을 해야 한대. 그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건?”

 “유나야.”

 “은비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은비는 새빨개진 유나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고개를 저었다. 유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네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네가 미웠어. 내가 그렇게 갖고 싶던 걸 다 가져놓고 철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

 “유나야, 네가 그랬지. 지금 여기서도 충분히 빛난다고.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도망치지는 마. 네 노래, 네 마음,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는 그걸 좋아할 거야.”

 

 

 

 

 

 

가만히 은비의 말을 듣고 있던 유나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환하게 웃으면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나를 보고 한껏 진지했던 은비도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순한 강아지 집에서 키우고 싶었는데. 뭐? 내가 강아지야? 몰랐어? 너 완전 강아지잖아. 나 강아지 아니야. 유나는 여전히 새빨간 눈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은비는 그런 유나의 얼굴을 부여잡고 시선을 맞췄다.

 

 

 

 

 

 “그런데 최유나. 너 왜 아무것도 안 해?”

 “응?”

 “아까 허리에 내 팔 두르던 사람 어디 갔어?”

 “ㄱ,그게..”

 “매번 이렇게 도망갈 거야? 이럴 때 서울 사람들은 바로 입 맞춘다던데..”

 

 

 

 

 

은비의 도발에 유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정말 그래도 되겠냐고 묻는 듯한 눈빛. 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결심을 한 듯 결연한 얼굴이 된 유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은비의 허리를 끌어안고, 조금씩 다가왔다. 아랫입술이 윗입술에 닿았다. 서툰 키스 솜씨 때문에 이와 이가 부딪히고 말았다. 두 사람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한번, 두번, 그리고 여러 번.

 

 

 

 

 

 

 

 

 

 

 

 

 

 

유나가 떠나는 날이 되었다.

 

며칠이고 비가 내리더니 그날 아침은 오랜만에 화창하게 해가 떴다. 아무리 눈을 감고 모르는 척 해봐도 유나가 처음 왔던 그날처럼 웅성거리는 소리가 온 집을 헤집어놓았다. 포터 트럭의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 틈으로 잘 가라는 인사가 돌림노래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예의 바른 유나가 하나하나 인사를 하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너 정말 안 나가볼 거야?”

 “안 간다니까.”

 “유나랑 친했잖아. 잘 가라고 인사 좀 하고 오지..”

 “알아서 잘 가겠지, 온 동네가 최유나 잘 가라고 인사할 텐데. 그리고 나 알바 가야 돼.

 

 

 

 

 

은비는 부모님과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귀를 막았다. 그렇다. 원래 같으면 30분 전 버스를 타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어야 했다. 하지만 은비는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집에 남아 유나가 떠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바보 같은 최유나, 얼른 가기나 할 것이지. 은비는 맨 처음 유나가 집에 온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밉살스러웠고, 지금은 좋아져 버린 사람. 가라고 등을 떠민 건 자신이지만, 막상 유나가 가는 뒷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혼자 남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자꾸만 유나가 머뭇거리는지 재촉하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쾅 하고 트럭 문이 닫히고, 터덜터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은비 너 집에 있었어? 유나한테 인사하지 그랬어.”

 “엄마가 대신 인사했으면 됐지.”

 “유나가 너한테 이거 꼭 전해주라더라.”

 

 

 

 

 

유나의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부모님은 정나미 없는 딸에게 눈을 흘기며 고이 접힌 종이 한 장을 전했다. 하얀 편지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담은 것이 누가 봐도 유나가 남긴 쪽지였다. 은비는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종이를 펼쳤다. 글은 길지 않았고 한눈에 들어왔다.

 

 

 

 

 

 

<은비야, 시골이 왜 좋냐고 물었지? 이제는 이유가 달라졌어.

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엄마, 나 좀 나갔다 올게.”

 “응? 어디 가는데??”

 

 

 

 

 

문을 박차고 집 밖으로 나선 은비의 눈에 들어온 건 유나의 낡은 자전거였다. 급한 마음에 받침대를 차 올리는 발길이 자꾸 헛돌았다.

 

 

 

 

 

 

은비는 저 멀리 보이는 파란 포터의 뒤를 따라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유나의 등에 붙어서 함께 달린 그 길이었다. 숨이 목까지 차 올랐다. 유나야, 부르지 못한 소리가 허공에 맴돌았다. 멀리 가면 안 돼. 가지 마. 자꾸 멀어지는 트럭을 보며 은비는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트럭이 멈춰서고 문이 열렸다. 유나였다. 은비를 발견한 유나가 은비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하얀 프로스펙스 운동화에 흙이 묻는 줄도 모르고.

 

 

 

 

 

 

 “은비야!”

 “바보야, 그렇게 뛰다 넘어져.”

 “너 못 보고 가는 줄 알았는데.. 고마워, 와줘서.”

 “너는 내가 배웅 안 나온 거 서운하지도 않아?”

 

 

 

 

 

환하게 웃고 있는 유나를 보며 은비는 괜히 심술을 부렸다. 뭐가 좋다고 웃고 있어.

 

 

 

 

 

 “우리 곧 다시 만날 거잖아, 그치? 나 아직 습관 못 고쳤으니까, 은비 네가 서울에 와서 손수건 가져가.”

 “최유나.”

 “응?”

 “혹시, 내가 서울에 못 가더라도 말이야.”

 “응..”

 “눈 쌓인 산에 매화가 필 때까지 기다릴게, 여기서.”

 

 

 

 

 

은비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올까 지레 팔(八)자 눈썹을 늘어뜨리고 울상이 되었던 유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비의 이마에 유나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다시 트럭은 덜덜거리며 길을 나섰다. 낡은 자전거에 기대 선 은비는 트럭이 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스무 살의 여름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