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Usee 2020. 4. 27. 00:11

 

 

 

 

 

 

 틱, 틱, 낡은 갈색 가죽시계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어느새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획회의, 맛없는 점심, 몇 개의 사건사고와 어느 공단의 채용비리 의혹에 대한 기사 송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으로 가득한 하루였다. 이제 오늘 하루만 해도 전국에 수십 건은 있었을 행사 중 하나에 참여하기만 하면 퇴근이었다. 하지만 유나는 선뜻 일어나지 못하고 책상 위에 올려둔 초대장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기자로서 맨 처음 행사에 참가했던 날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어느 사학법인에서 대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하는, 아무도 관심 없는 작은 규모의 행사였다. 하지만 유나에게는 1년을 통틀어 그 행사만큼 커다란 행사는 없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처음으로 ‘PRESS’라고 박힌 표식을 받았을 때의 그 기분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셀카라면 자신이 없는 유나이지만, 그날만큼은 아무도 없는 구석에서 표식이 다 나오도록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아쉽게도 그 감동과 벅찬 마음은 수백, 수천 개의 보도자료와 함께 기억에서 스러져 갔다. 선배들 말마따나 처음의 떨림을 잃는 것이야말로 경험이 쌓이고 노련해지는 것의 대가이니까. 가끔 좀 씁쓸하기는 해도 수많은 행사의 이면에 숨겨진 의도와 배경을 읽는 눈을 가지게 됐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어젯밤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오늘 아침 유나는 평소보다 무려 5분이나 늦게 출근했다. 거울 앞에서 이미 수백 번도 더 고친 옷 매무새를 다시 고치느라 시간을 잡아먹은 탓이었다. 분명 어제 세탁소에서 가져온 정장인데 벌써 주름이 잡힌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언제나 촉감이 부드러우면서도 잘 구겨지지 않는 흰 셔츠는 언젠가의 데이트에서 은비가 직접 골라준 것이었다. 평소에는 귀찮아서 찾지도 않는 향수도 맥박이 뛰는 곳에 뿌렸다. 마지막으로는 시계. 여러 시계들 중에서도 이런 날이면 언제나 손이 가는 건 오랫동안 온갖 시험이며 면접 때마다 함께 해 온 낡은 갈색 가죽시계였다.

 

 

이렇게까지 유나가 예민해지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정은비. 오늘은 OO그룹 정은비 이사의 사회공헌 비전 선포식 및 자선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행사 준비를 하느라 바빴던 은비와 몇 주 만에 만나는 날이기도 했다.

 

 

 

 

 

 

유나는 다시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20초가 지나 있었다. 오늘 하루종일 시계를 몇 번이나 봤을까 세어보려다가 헛웃음이 났다. 기업 행사에 참여하면서 이렇게 긴장할 일인가 싶어서. 하지만 그 동안 OO그룹 행사는 최대한 피해왔기에 오랜만인 데다, 공식 석상에서 은비를 볼 생각을 하면 자꾸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제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먼저 안기며 키스를 조르는 은비와 정은비 이사의 간극에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정신 차려, 최유나. 공과 사 구분은 해야지.

 

 

 

 

 

 

 “유나야, 오늘 OO그룹 행사 갈 거지?”

 “네, 가야죠. 선배도 가세요?”

 “아니, 저녁에 경찰서 가봐야 돼. 거기 호텔 밥 맛있다던데 후기 꼭 들려줘, 알았지?”

 “먹게 되면요.”

 “뭐? 밥을 안 먹어? 오늘따라 하루종일 정신이 빠져 있는 것 같더니.. 괜찮은 거야?”

 “제 걱정하지 말고 빨리 가보기나 해요. 관악구까지 가려면 1시간 반은 걸리겠네.”

 “응, 그래야지..가 아니고, 뭐야, 나 관악서 가는 건 어떻게 알았어?? 너 내 스토커야?”

 “황 후배가 거기 있잖아요.”

 “아, 들켰네, 들켰어.”

 

 

 

 

 

 당했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예린 덕분에 그나마 유나의 긴장이 좀 풀렸다. 예린의 말대로 오늘 행사장은 은비네 그룹 계열의 호텔이었다. 레스토랑은 물론이고 룸서비스까지 훌륭하다던 바로 그곳. 제 이름 앞으로 온 초대장을 펼쳐 보았을 때, 결국 호텔로 한번 부르고야 마는구나 싶어 유나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잘 접어둔 초대장을 챙겨 일어나려던 유나는 마지막으로 보도자료를 기초로 작성한 기사 초안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실수하는 건 원래 싫어하지만, 오늘 이 기사만큼은 더더욱 실수가 없어야 했다. 은비의 사진 아래 오타나 어색한 표현이 있을 걸 상상하면 끔찍했으니까. 마지막 퇴고를 마치고 나자 이젠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잘 다녀와, 예린의 응원을 등에 업고 무거운 발을 뗐다.

 

 

 

 

 

 

 

 

 

 

 

 “선배!”

 “먼저 와 있었네?”

 “그럼요, 아까 와서 행사장 다 둘러봤어요.”

 “역시 믿고 보는 김예원 기자님,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OO호텔 컨벤션홀은 이미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정은비 이사가 본격적으로 사회공헌 활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그룹의 향후 후계 구도를 가늠케 하는 지표 중 하나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XX일보에서도 수많은 행사 중에도 유독 이곳에 사내에서 인정 받고 있는 유나와 예원을 보낼 정도로 이 행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 엄청 많네요.”

 “그러게. 다들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지?”

 “선배도 오늘 평소랑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정장 입은 거 처음 봐요.”

 “그래? 괜찮아 보여?”

 “조금..? 끝나고 어디 가시나 봐요?”

 “비밀.”

 

 

 

 

 

유나의 시원찮은 대답에 예원은 그게 뭐냐고 투덜거렸다. 아끼는 동생이자 좋아하는 동료이지만, 오늘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정은비 이사 만나러 가, 이렇게 말했다간 행사고 뭐고 당장 예원에게 끌려가 취조를 당할 테니까.

 

 

예원이 미리 자리를 잡아준 덕분에 여유가 생긴 유나는 행사장 내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휘황찬란하지는 않지만 실내 장식이나 조명 하나하나 신경을 쓴 티가 물씬 났다. 유나가 오는 걸 아는 은비가 자리까지 배려해준 것인지 프레스석은 VIP석과 매우 가까웠다. 유나는 자기도 모르게 맨 앞 줄 정중앙 좌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비의 자리일 게 분명한 그 자리는 아직 비어있었다.

 

 

 

왜 안 와, 정은비. 보고 싶은데.. 우리 몇 주 동안 못 봤더라? 잠시 이런 생각에 빠져 있던 유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어깨에 닿는 손에 퍼뜩 놀라 정신을 차렸다.

 

 

 

 

 

 “선배.”

 “어, 어, 왜?”

 “아까부터 저분이 선배 찾는 것 같아서요.”

 “XX일보 최유나 기자님?”

 “네, 전데요.”

 “이거,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까만 정장을 입은 남자가 허리를 깍듯이 숙이더니 무언가를 전했다. 유나는 얼떨결에 남자가 건네는 USB를 받아 들었다. 물건을 건네고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 분명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분명, 저 사람은.. 은비의 비서 중 한 명이었다. 은비가 찍힌 사진에 언제나 같이 나오던 것을 겨우 생각해냈다. 행사 시작 10분 전. 은비가 뭘 보냈을까. 유나는 급히 노트북을 켜 USB를 연결했다.

 

 

 

아무 특색도, 무늬도 없는 USB에 들어 있는 건 단 한 개의 워드파일뿐이었다. 파일의 제목은 <금일 보도자료 수정 배포>. 뭔가 이상했다. 행사 시작 전에 보도자료를 수정하는 일은 가끔 있지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전달하는 경우는 없었다. 길어야 두 장이 채 되지 않는 글. 본능적으로 아무도 보지 못하게 화면을 가린 유나는 자기도 모르게 노트북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미리 구도를 이리저리 잡아보던 예원이 유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아무것도. 괜찮아.”

 

 

 

 

 

 유나는 천천히 다시 글을 읽어보았다. 내가 뭔가 잘못 읽은 거겠지. 아닐 거야.

 

 

 하지만 몇 번을 읽어보아도 글의 내용은 한결같았다. 처음 배포된 보도자료와는 전혀 다른, 그 누구도 준비하지 못했을 기사. 유나를 포함해 여기 앉은 모든 사람들이 은비에게 한 방 먹은 거나 다름없었다. 시작 7분 전, 시간을 확인한 유나는 천천히 머리를 식히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자로서의 특종에 대한 욕심과 이 기사를 냈을 때의 후폭풍, 오직 그 두 개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마침내 행사장 문이 닫히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처음 본 그날처럼 수행원들을 데리고, 은비가 아주 천천히 유나 옆으로 다가왔다. 유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래서 프레스석을 여기다 둔 거구나. 은비의 의도를 일찍 알았다면 지금 이 상황에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진심이야? 정말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 

 

 

 

 

 

유나의 눈빛에 담긴 질문에 은비가 느리게, 하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행사 시작 5분 전, 특종에 허락된 시간은 겨우 300초 남짓이었다. 오래 생각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이미 작성되어 있는 보도자료에 수백, 수천 번 생각했던 문장들을 더하고 빼고 바꾸고 다듬었다. 마지막 온점 하나를 찍고 나자 땀 한 방울이 턱 아래로 흘렀다.

 

 

 

 

 

 

 “오늘 자선행사에 와 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올해로 10년을 맞이하는 이 행사는 앞으로도 우리 OO그룹의 대표적인 사회공헌 활동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특히 오늘은 제가 이사로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이 행사를 맡게 된 날로서, 그 무게감과 의미를 다시 새겨보고자 합니다.”

 

 

 

 

 

 행사는 처음 배포된 보도자료와 똑같이 진행되었다. 판에 박힌 인사, 소개영상, 은비의 짧은 연설까지. 모든 관객과 기자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음 순서는 질의응답, 축하공연, 폐회식, 단 3개뿐이었다.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면 기자들은 각자 기사를 송고하고 몇 분 안으로 모든 보도가 끝날 것이었다. 유나는 입이 바짝바짝 말라서 연거푸 물을 들이켰다.

 

 

 

 

 

 “선배, 질문하실 거죠? 그때 찍을게요.”

 “응, 예원아, 그리고..”

 “네.”

 “질의응답 끝날 때 긴장 풀지 말고 있어.”

 “왜요?”

 “나중에 설명할게.”

 

 

 

 

 

 연달아 설명이 부족한 대답을 들은 예원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오늘따라 표정이 굳어 있는 유나를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나가 뭔가 부탁할 때에는 모두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꽉 쥐고 있는 유나의 주먹은 이제 하얗게 질려있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예정대로 진행될 일과 그렇지 않은 일, 둘 다 좋은 결과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새로운 비전에 대한 설명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 질문을 받겠다는 은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나는 손을 높이 들었고, 두 눈이 마주쳤다. 의외라는 듯 은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준 건? 마치 이렇게 묻는 것처럼. 하지만 유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은비가 유나 쪽을 가리켰다. 마이크를 건네 받은 유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무덤덤한 표정과 목소리로 준비해 온 질문을 던졌다. 상대가 누구든 해야겠다고 생각한 질문을.

 

 

 

 

 “OO그룹이 10년 동안 꾸준하게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오신 점,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감사 말씀 드립니다. 그런데 그 동안 OO그룹 총수 일가 중 몇몇의 행적은 사회공헌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던 게 사실입니다. 재벌가에서 자선행사나 기부 등을 사회적 비난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적도 많죠.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보다는 그룹의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시키기 위한 얼굴마담이라는 세간의 소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원래도 조용했던 행사장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 숨을 죽이고 유나와 은비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매일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첫째와 야망 있고 똑똑한 둘째, 아직 명시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후계 구도, 그리고 앞으로 OO그룹이 나아갈 방향, 은비의 대답은 이 모든 물음표에 대한 대답이 될 수도 있었다. 유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은비는 알 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그룹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 감사드립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처럼 저도 저희 회사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회적 가치, 그리고 공유 가치 창출은 그런 고민 중에서도 아주 큰 고민이에요. 이곳은 저희 아버지가 처음 회사를 경영하기 시작하신 곳이고 저희 직원들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제가 직접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던 비전을 발표한 것은 그런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얼굴마담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저를 통해 조금이라도 그룹 이미지가 좋아질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잠시 멈추거나 느려지기는 해도 막힘 없는 은비의 대답에 박수가 쏟아졌다. 프레스석에 앉은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보도자료를 수정하느라 바빴다. 몇몇은 급하게 손을 들어 다음 질문 기회를 잡았다. 정은비 이사의 솔직한 대답을 기사에 담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건 없을 테니까.

 

 그 틈을 타 마지막으로 기사를 수정하는 유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180717 OO그룹 자선행사 보도자료 최종 1, 2. 평범한 제목의 2개의 파일. 유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USB로 넘겨받아 수정한 기사의 제목을 바꾸었다. The Scoop. 유나가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은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축하공연을 보시기 전에,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중대한 발표를 하고자 합니다.”

 

 

 

 

 

 

 유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메신저 앱을 켰다. ㄱㅜㄱ장님, 국정,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오타가 나는지, 이제는 심장이 아플 정도로 세게 뛰었다. 국장님. 제가 보낸 기사, 지금 당장 올려주세요. 특종입니다. 제 인생 특종이요.

 

 

 

 

 

 “저 곧 결혼합니다. 상대는, XX일보 최유나 기자님이구요.”

 

 

 

 

 

 아주 천천히, 느리게 감긴 테이프처럼 은비의 문장 하나하나가 유나의 귀에 박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프레스석으로 쏟아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저 멀리서 조금씩 커졌다. 1초, 2초, 3초,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예원이 카메라를 들었다. 최유나, 이거 뭐야? 무슨 소리야? 메신저 앱 알림과 걸려오는 전화로 휴대폰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유나는 미친 듯이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 전원을 꺼버리고 은비의 뒤를 쫓아 행사장을 뛰쳐나갔다.

 

 

 

 

 

 

 

 

 

 

 

 

 

 “어머, 최 기자님, 어딜 그렇게 뛰어가세요?”

 “정은비, 너 진짜,”

 “어서 와.”

 

 

 

 

 문을 박차고 나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VIP대기실, 그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정은비였다. 유나가 들어오기가 무섭게 대기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의 입술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맞닿았다. 한참이나 못 본 아쉬움과 방금 전의 긴장감, 떨림, 흥분,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공기를 달구었다. 잠깐, 잠깐만, 밀어내는 손길에 겨우 입술을 뗀 유나에게 장난스러운 질문이 쏟아졌다.

 

 

 

 

 

 “오늘따라 급하신 거 아니에요? 질문도 1등으로 하시고.”

 “지금 나 심장 뛰는 소리 들려?”

 “오늘 정장 예쁘네. 알고 입고 온 거야?”

 “알았냐고?? 미리 귀띔이라도 해줬어야지!”

 “그랬으면 우리 최 기자님 자존심상 그 기사 안 쓸 거 다 아는데?”

 “…”

 

 

 

 

 

 은비에게 정곡을 찔린 유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리 보도자료를 받아서 쓰는 특종이라니, 용납할 수 없어. 그거 봐. 너 지금 되게 표정 결연한 거 알아?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내가 준비해 온 기사도 있었는데. 그래서 질문 다 하셨잖아요. 내 대답 마음에 안 들었어? 아니면, 특종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꼬리를 흐리는 유나를 보며 결국 은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유나는 그대로 은비의 허리를 감싸 안고 쇼파에 쓰러졌다.

 

 

 

 

 

 “컨설팅 값, 특종 값, 다 이렇게 내면 되죠?”

 “여기서? 스위트룸 잡아놨는데,”

 “안 돼.”

 “또 청탁금지법 말 하려고 그러지.”

 “아니, 내가 못 참아.”

 

 

 

 

 

 은비의 귓불과 목덜미, 쇄골에 키스를 퍼부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 불빛이 환하게 내려앉아 붉게 달아오르는 살을 비추었다. 아까 정장을 입고 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곳곳마다 입술과 손길이 스쳤다. 유나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던 은비가 마지막 단추에서 손을 멈추었다.

 

 

 

 

 

 “근데 유나야,”

 “나 좀 급한데.”

 “대답 안 해줄 거야?”

 “무슨 대답?”

 “나랑 결혼할 건지 말이야.”

 

 

 

 

 

 아까 그 당당하고 패기 넘치게 자기 결혼을 발표해 버리던 이사님은 어디 가고, 은비는 유나의 셔츠 옷깃을 붙잡고 조금 떨고 있었다. 유나는 그 두 손을 풀어 제 목을 두르게 하고 그대로 가슴을 물었다. 높은 소리가 방음이 완벽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은비야. 자기 이름으로 낸 특종에 반박 기사 내는 기자가 어디 있어.

 

 

 

 

 

 

 

 

 

다음날 모든 언론의 1면은 정은비 이사와 최유나 기자의 결혼발표가 차지했다. 물론 행사 당일 가장 먼저 커다란 제목으로 특종을 보도한 XX일보가 온라인 조회수나 종이신문 판매부수, 화제성 측면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것은 당연했다. XX일보 기자들 사이에서는 매달 톱뉴스 1위를 차지하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자기 기사로 특종을 알리며 1면을 차지한 최유나에 대한 부러움 섞인 원성이 드높았다. 하지만..

 

 

 

 

 

광화문을 지나 종로로 이어지는 높고 낮은 빌딩들 사이로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여자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걸었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다급한 걸음걸이와 무거운 표정 덕분에 여자가 지각이라는 것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긴 다리로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넘었지만, 오늘따라 하필이면 출입증은 여러 번 버벅거리고서야 문을 열어주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유나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초조한 마음과 달리 시계는 태평하게 8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최 기자 내일 8시까지 국장실로 와. 휴대폰을 꺼버리기 직전에 확인한 마지막 메시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열 통이 넘는 전화와 100개 가까운 메시지에 답하지 않은 유나에게 국장이 보낸 최후 통첩이었다. 그런데 30분도 넘게 지각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영원히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엘리베이터는 착실하게 6층에 도착할 뿐이었다.

 

 

 

 

 국장실, 저 세 글자가 이렇게까지 커다랗게 보인 적이 있었나. 유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저곳에 들어갔던 마지막 날이 바로 은비에게서 전화가 왔던 날이었다는 게 한층 더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제 그 둘이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사실에 대해 국장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어제 결혼 발표 순간에도 나지 않았던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사표 내라고는 안 하시겠지.

 

 

 

 똑똑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화장실 가셨나. 유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았다.

 

 

 

 

 

 “국장님, 저, 최유,”

 “지금이 몇 신데 이제 와? 너 이 자식, 이제 재벌가로 들어간다고 국장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국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히익 놀란 유나는 바로 허리를 90도로 숙여 잘못을 구했다. 그러나 곧, 깊이 허리를 굽힌 유나의 머리 위로 껄껄 웃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진짜, 저 이중인격자 같으니라고.

 

 

 

 

 

 “뭘 그런 거 가지고 놀라시고 그러십니까, 최 기자님. 이제 내가 너한테 잘 보여야 되는 거 아니야? 나도 청첩장 줄 거지?”

 “다, 당연하죠, 국장님.”

 “사실 말이야, 어제는 좀 화가 났거든. 이 자식이 나를 속여? 내 눈 앞에서 연애질을 해??”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합니다.”

 “근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나 같아도 못 했겠다 싶더라고. 그 최유나가, 정은비 이사랑 결혼을 한다고 어떻게 말을 하겠어?”

 “어.. 그럼 저 사표 안 내도 되는 건가요?”

 “사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제 그 와중에도 결혼 발표에, 행사 보도까지 기사를 두 개나 보내는 독종은 천생 기자 해야지. 다들 허둥지둥 하느라 둘 다 내보낸 곳은 아무데도 없어. 나도 기자 생활 20년 했지만, 같은 동료로서 그 사명감 존경한다.”

 

 

 

 

 사직까지 각오하고 찾아온 자리에서, 존경하는 선배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받은 유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울컥하는 바람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방심하기엔 일렀다.

 

 

 

 

 

 “그래도, 회사 기물 분실할 뻔했던 건 책임져야지?”

 “네?”

 “김 기자 말 들어보니까 노트북에, 녹음기에, 다 놓고 홀랑 정 이사 따라 나갔다며?”

 “아니, 그게,”

 “그거 다 잃어버렸으면 얼마인 줄 알아? 정신 똑바로 안 차린 벌로 오늘 수습들 데리고 지방 출장 다녀와. 9시 반 기차다.”

 “아 진짜, 국장님!!”

 

 

 

 

 

 

 

 

 

 이 세상에 ‘나’로 시작하는 기사는 없다. 기사의 제1원칙이자, 아무도 어기지 않는 철칙. 하지만, '우리'라면 어떨까?

 

 

최유나 기자와 정은비 이사의 연애 이야기 끝.

 

 

 

 

 

 

 

 

* 번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