윶읂(구칠즈)/연작&연재

Happily Ever After

whatUsee 2020. 4. 27. 00:10

 

 

 

 

 

 

 

낙엽이 부서지는 거리 위로 11월은 산불 조심의 달, 동계 계절학기 개설 희망과목 의견 제출, XX그룹 하반기 공채 모집 같은, 생김새도 내용도 제각각인 플래카드들이 볼품없이 거세게 펄럭였다. 제법 차가워진 바람에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한껏 움츠린 어깨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린 은비 역시 찬바람을 정통으로 맞고 얼굴을 찌푸렸다. 잠깐 앉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밖은 어둑어둑했다. 조금 뒤늦게 따라 나온 친구 역시 얇은 코트를 탓하며 팔짱을 껴왔다.

 

 

 

 

 

 

 “으, 너무 춥다. 벌써 이렇게 추우면 어떡하라고?”

 “나 겨울 계절은 포기할래.”

 “정은비, 망한 학점을 생각해.”

 “몰라, 그건 나중에 생각할 거야. 학교에서 얼어 죽을 수는 없어.”

 “그래, 네 마음대로 하세요. 저녁이나 먹고 가자.”

 

 

 

 

 

 

나 레포트 써야 되는데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은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유나도 공부한다고 코빼기도 안 비친 게 몇 주째인데, 집에 일찍 가서 뭐하나 싶어서. 유나 얼굴도 못 보고 엄마 아빠한테 잔소리나 들을 바에는 공부하는 척하다가 늦게 들어가는 게 낫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학생식당은 한산했다. 혼자 밥을 먹는 복학생이나, 같이 공부를 하는 커플 몇몇만 눈에 보일 뿐이었다. 보는 눈이 없어서인지 서슴없이 애정표현을 하는 커플들도 꽤 보였다. 그래 봤자 돈까스를 썰어서 앞에 놔준다거나, 자리가 남는데도 굳이 옆에 앉아 있다거나, 가끔 뽀뽀를 한다거나 하는 정도였지만, 친구의 장탄식은 요란했다.

 

 

 

 

 

 

 “조오오-을 때다!”

 “야, 조용히 해.”

 “뭐, 보라고 하는 거잖아 쟤네도.”

 “부러우면 지는 거래.”

 “패배를 인정하지. 휴, 벌써부터 저러고 다니는데 더 추워지면 아주 한몸이 되겠네. 외롭다, 외로워!”

 “어제는 또 바빠서 연애할 틈도 없다며.”

 “네가 이 언니의 마음을 알아?”

 “나도 사귀는 사람 없거든요?”

 “왜 이래- 너한텐 그 꼬맹이 있잖아. 하나도 안 외로우면서 동지인 척 하지 마.”

 

 

 

 

 

 

은비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데서 유나 얘기가 나오면 할 말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10년 넘게 무럭무럭 잘 자라준 연하를 옆에 두고 외로울 틈 따위 없었으니까.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이미 입꼬리가 삭 올라갔는지 친구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외롭다는 친구 앞에서 그렇게 좋은 티를 내야겠어?”

 “티 났어? 미안.”

 “하나도 안 미안한 거 다 알거든. 너 계절학기 안 듣는 것도 그 꼬맹이 때문이지? 걔 수능 끝나면 같이 놀러 다니느라 바쁘니까 못 듣는 거지?”

 “노 코멘트.”

 “아, 정은비 얄미워 죽겠어.”

 

 

 

 

 

 

입이 댓 발 튀어나와 투덜거리는 친구의 말은 이미 은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수능, 그 한 단어가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유나가 인생에 다시 없을 만큼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고 있는 건 곧 수능을 치르기 때문이었다. 요새 은비는 시간만 나면 유나가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어디 아픈 덴 없는지 궁금했다. 이미 더 잘 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해오고 있는 유나를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큰 시험을 앞두고는 같이 긴장이 되기 마련이었다.

 

 

언제 그 꼬맹이가 쑥쑥 자라서 수능을 치게 됐지? 나 수능 볼 때 자기가 같이 시험 치는 것처럼 밥도 못 먹고 잠도 설쳐서 안 그래도 없던 살이 쪽 빠졌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유나는 차곡차곡 용돈을 모아 언니랑 닮아서 사왔다며 합격 기원 찹쌀떡을 내밀었다. 언니랑 닮아서 사왔다는 말이 너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더니 또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홱 돌아서 가버리던 유나가 생각나서 조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유나도 시험을 보는데 뭐라도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은비는 그제서야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실감했다. 뭐 사주지? 근데 유나가 좋아하는 게 별로 없는데.. 고구마를 박스째 사다 줄 수도 없고.. 고구마… 고구마 케이크…?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은비는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뭐해, 갑자기??”

 “나 먼저 갈게.”

 “왜? 어디 가는데?”

 “케이크 구우러.”

 “뭐? 야, 정은비!”

 

 

 

 

 

 

 

 

 

 

 

 

 

 

은비는 찬 공기를 뚫고 집 근처 대형마트로 향했다. 하도 들어 익숙한 마트의 CM송을 흥얼거리는 은비의 기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어쩜 이렇게 똑똑한 생각을 해냈는지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구마라면 찐 고구마, 군고구마, 고구마말랭이, 종류를 막론하고 좋아하는 멍뭉이에게 고구마 케이크를 구워줄 생각을 하다니, 천재적이었다. 이미 온갖 매대를 점령하고 있는, 철썩 붙는다는 엿이나 찹쌀떡, 윤기가 흐르는 초콜릿을 보고도 코웃음이 났다. 유나의 선택을 받을 것은 오직 하나, 은비가 직접 구운 고구마 케이크일 것이기 때문에.

 

 

 

 

 

달걀, 고구마 600g, 박력분, 버터, 생크림, 베이킹파우더.

 

 

 

급하게 적어온 메모지가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실수 없이 재료를 사는 데 성공한 은비는 콧노래를 불렀다. 유나야,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이 언니가 너를 위해서 케이크를 구워줄게. 너무 감동받으면 안 된다? 유나가 그 똘망똘망한 눈으로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리진 않을까 은비는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장을 보고 왔을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베이킹 블로그나 X투브 영상을 수없이 찾아본 만큼 자신감도 잔뜩 올라 있었다. 너무 잘 구워서 매일 구워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그럼 매일 구워줄 테니까 같이 자취하자고 할까? 어머, 나 정말 멍뭉이 하나 키우게 되는 거야?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왜 항상 다른 걸까.

 

 

 

 

 

가장 기본이라고 하던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는 데 달걀 반 판을 다 써버린 은비는 결국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여러 대 맞고 나서야 흰자와 노른자가 분리되는 기적을 보았다. 박력분에 베이킹파우더를 넣다가 식탁에 한 무더기 가루를 엎는 건 이제 일도 아니었다. 반죽을 아무리 치대도 그럴 듯한 모습이 나오지 않아 짜증을 내던 은비는 결국 엄마에게 SOS를 쳤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부엌과 식탁을 보고 집에서 당장 내쫓을 기세인 엄마한테 유나에게 줄 거라고 핑계를 대 쫓겨날 위기를 모면하고 겨우겨우 오븐에 반죽을 넣은 은비는 그제서야 집에 휘핑기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눈물을 머금고 직접 생크림 휘핑을 치고 나니 오븐에는 빵이 아니라 까만 덩어리가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결국 밤 10시 반이 넘은 시각에 문을 닫으려는 빵집을 찾아가 시판 카스테라를 사온 은비는 고구마와 생크림을 함께 치댄 무스.. 아니 무스 비스무레한 것을 빵 위에 덕지덕지 바르고 그대로 뻗었다. 온몸에 열이 나는 기분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고구마 케이크를 사오면 됐잖아! 하는 엄마의 꾸지람에도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난 그냥 유나한테 내가 만든 케이크를 먹이고 싶었던 죄 밖에 없다고..

 

 

 

 

 

 

 

 

 

 

 

 

 

슬프게도 온몸에 열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은 기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은비는 그대로 앓아 누워 주말 내내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38도까지 열이 오르고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게 딱 몸살 기운이었다.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쓰느라 온몸에 찾아온 근육통은 덤이었다. 정신이 몽롱해서 자꾸만 잠이 들었다 깨는 바람에 나중에는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조금 헷갈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구박을 하던 가족들도 꽤 심하게 앓는 은비가 걱정되었던지 죽을 쑤고 은비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배려해 줄 정도였다.

 

 

열이 올라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던 은비는 어린 유나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언니 아프면 의사 선생님한테 혼난댔어요. 언니한테 뽀뽀하면 잠 깨요? 오물오물 말하는 어린 유나를 보며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하나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어느 순간 좀 더 또렷하고 어른스러운 발음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바보야, 누가 이런 거 만들다가 쓰러지래. 평소에 밥도 안 해먹으면서.”

 “…”

 “그래도 오랜만에 정은비 얼굴 보니까 좋다. 많이 보고 싶었어.”

 “…”

 “나 수능 치고 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기나 해. 언니 때문에 하루하루 불안해 죽겠으니까.”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이건 분명 유나의 목소리였다. 한번도 좋아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 없는 유나의 고백이었다. 은비는 심장이 간질간질해져서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기가 힘들었다. 이러다간 잠이 다 깬 걸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어색하게 잠이 깬 척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유나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처럼 불퉁한 표정으로 은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은비가 만든 고구마 케이크 상자를 품에 소중하게 안고서.

 

 

 

 

 

 

 

 “뭐야아 언제 왔어?”

 “방금. 공부는 내가 하는데 왜 언니가 앓아 눕고 그러냐?”

 “그러게, 요새 학교가 좀 추워서 그런가.. 그거 먹어봤어?”

 “이게 뭐야, 다 삐뚤어져가지고. 그래도 맛은 있더라.”

 “맛있었어?”

 “어차피 이거 망한 거라 안 먹을 거지? 다 가져간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유나의 얼굴을 비추었다. 밤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은비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틱틱거리는 말투와 달리 고구마 케이크를 내려다 보는 얼굴에는 선물을 받은 강아지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은비는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유나를 안아주고 볼에 뽀뽀를 퍼붓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유나에게 병을 옮길까 싶어 가만히 유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기다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위안이 되었다.

 

 

 

 

 

 

 “최유나.”

 “응?”

 “나랑 맨날 놀러 다니려면 수능 잘 봐야 돼, 알았지?”

 “뭐래.. 언니야말로 빨리 낫기나 해. 나 간다!”

 

 

 

 

 

 

밝은 조명 아래였다면 분명 얼굴이 빨개져 있을 유나를 생각하며 은비는 작게 웃었다. 유나가 안고 온 찬 공기가 적당히 데워져서 따뜻했다. 유나가 떠나고 난 후 은비는 깊이 잠들었다. 사라져 버린 고구마 케이크가 아니었다면 꿈을 꿨던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깊고 편안한 잠이었다.

 

 

 

 

 

 

 

 

 

 

 

 

 

유나는 유나답게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아니,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했다. 그렇다. 은비는 유나에게서 직접 소식을 듣지 못했다.

 

 

처음에는 시험 치르느라 고생했으니까 힘들고 피곤해서 연락을 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괜히 부담이 될까 봐 먼저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유나는 꽤 자존심이 센 편이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언니니까, 이 정도는 기다려야지. 하지만 엄마에게서 유나 시험 잘 봤다던데? 무난하게 합격할 것 같다더라, 그 말을 듣고 나서는 은비도 조금씩 조급해졌다. 특히 낮이고 밤이고 교복을 입고 우르르 몰려 다니는 무리들을 볼 때면 유나에게 당장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참자, 유나가 먼저 연락을 하겠지, 사정이 있겠지, 근데 왜 연락을 안 하는 거야 이 똥강아지가!!

 

 

 

 

 

 

 

 

기다리다 못해 설마 다른 사람이 생긴 건 아닐까, 나랑 만나기 싫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든 은비는 침울해졌다. 어차피 유나는 제 또래 아이들과 놀러 다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텐데, 괜히 기다렸다가 상처를 받을까 봐 겁이 났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고 요 며칠 친구와 술을 마셔보아도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늘도 술을 마시는 동안 집에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5통이나 되었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 엄마한테 혼나도 할 말이 없는 게 억울했다. 꼬맹이 다 클 때까지 기다렸는데 연락이 없어서 슬퍼. 그렇게 어떻게 말해? 근데 나 너무 슬퍼 엄마.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도어락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는데, 눈앞에 서 있는 건 엄마가 아니라 유나였다.

 

 

 

 

 

 

 

 

 “..나 그렇게 안 취했는데, 왜 우리 강아지가 보이지?”

 “정은비, 이 시간까지 술 마시고 다니고 그러지. 전화도 안 받고.”

 “진짜 최유나야? 우리 강아지 맞아?”

 “오늘 아줌마 아저씨 늦게 들어오신대. 얼른 씻고 자.”

 

 

 

 

 

 

 

잔소리만 한 바가지 퍼붓고 난 유나는 은비의 겉옷을 받아 들고 물을 갖다 주고서는 집에 갈 것처럼 신발을 신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할 말만 하고 가버리려는 게 미워서 은비는 유나의 앞을 막아 섰다. 얼마 만에 만난 최유나인데,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야, 너, 왜 나 피해?”

 “안 피했어.”

 “지금도, 어? 막, 나 오니까 바로 가려고 하잖아. 왜 연락 안해?”

 “내가 언제 안 했다 그래. 전화 안 받은 건 언니잖아.”

 “거짓말! 너 수능 치고 2주 넘게 아무 연락도 안 했잖아.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이제 나보다 애들이랑 노는 게 더 재미 있어?”

 “그게 아니라,”

 “그럴 거면 다른 사람이랑 놀지 말라고, 술 마시지 말라고, 나 때문에 불안하다고, 그런 말도 하지 말았어야지. 내가 얼마나, 얼마나 너 기다렸는데..”

 

 

 

 

 

 

 

이미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뚝뚝 흘렀다. 유나 앞에서 울어버리려던 건 아닌데, 술기운 때문인지 말을 하면 할수록 서러웠다. 너 다 클 때까지 기다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도 나 좋아하잖아, 바보야! 엉엉 우는 은비를 보고 한숨을 푹푹 쉬던 유나는 눈을 질끈 감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은비의 옷깃을 잡아 끌었다. 갑자기 유나의 얼굴이 확 가까워졌다는 걸 알아차릴 때쯤에는 이미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후였다. 은비는 아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술기운 때문인지 놀라서인지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유나야..?”

 “진짜.. 무슨 말할 틈을 안 주고 그러냐! 오늘 너무 취한 거 같아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몰라, 망했어.”

 “나 방금 술 다 깼어.”

 “연락 안 하긴 무슨, 어떻게 고백할지 고민하느라 그랬다 왜! 이젠 나 왕자 하겠다고 우기기에는 너무 커버렸는데, 지금도 언니가 계속 예뻐 보이고 좋은데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으니까, 언니는 어른이니까 그냥 나 애로 보는 거 아닐까,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고 막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나서 답답해 죽을 뻔 했단 말이야 나도.”

 

 

 

 

 

 

 

지난 2주 간 하려던 말을 다 꺼내는 것처럼 유나의 말은 속사포 같이 쏟아졌다. 마지막 단어를 뱉을 즈음에는 이미 얼굴이 새빨개져 있을 정도였다. 반대로 유나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은비의 표정은 환해졌다. 항상 눈빛으로, 몸짓으로만 들었던 유나의 고백을 직접 듣는 기분은 이런 거였구나. 은비는 유나의 양 볼을 잡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멍뭉이 같은 까만 눈에 물음표가 두 개 떴다가 부끄러운지 시선을 돌렸다.

 

 

나 봐, 유나야. 그대로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던 아까 첫 키스와 달리 이번에는 좀 더 길고 깊게.

 

 

 

 

 

 

 

 

 “..뭐야, 갑자기.”

 “자, 이제 정식으로 말해봐.”

 “뭐를?”

 “사랑한다고 아직 안 했잖아.”

 “..랑해.”

 “뭐라고?”

 “사랑한다고.”

 “나도, 유나야.”

 

 

 

 

 

 

 

유나가, 사랑한대..! 은비는 조금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기다려 시작된 사랑이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그런 말로 마무리 될 것 같은 이야기.

 

 

 

 

그런데 유나야, 우리 부모님 언제 오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