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글자(8 letters)
- 은비야 뭐해?
은비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는 알림이 계속 남아 있는 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잠깐 뜬 알림창으로 이미 확인한지 오래인 발신인과 단 한 줄, 다섯 글자의 질문. 살면서 수백, 수천 번도 더 받아본 질문이지만 유독 유나의 뭐하냐는 질문에는 왜 이렇게 대답을 하기 어려운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일어났어
배고프다
어제 엄청 늦게 자서 눈 부은 것 같아ㅠㅠ
다른 친구에게라면 이미 세 줄, 네 줄이 넘게 의미 없는 이모티콘까지 적절히 섞어가며 대답을 넘기고 대화를 이어나갈 의무를 던져두었을 은비지만, 단 한 글자도 생각해내지 못한 지 15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뭐해? 최유나가 이 한 마디를 입력하는 데 든 시간은 15초도 되지 않을 텐데, 왜 나 혼자 이렇게 오래 걸려야 해? 아침부터 하긴 뭘 하겠어? 내 생활 패턴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으면서. 오늘 약속 있냐고, 나와서 같이 걷자고,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되잖아. 왜 항상 유나 너는 이런 식이야?
은비는 괜히 베개 옆, 머리맡에 항상 놓아두는 털이 복슬복슬한 리트리버 인형의 꼬리를 툭툭 쳤다. 유나를 닮아서 그 자리에 놓아둔 것이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괜히 그 인형까지 미웠다. 하지만 까만 눈망울까지 유나와 똑닮은 인형을 괴롭히는 건 은비의 마음을 더 약하게 만들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또 이 말은 내 몫이지 뭐.
- 나 방금 일어났어! 오늘 날씨 엄청 좋다 약속 없으면 카페 갈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신나 하는 이모티콘까지 붙여 보냈지만, 은비는 1이 없어지지 않을까 봐, 답장이 빨리 오지 않을까 봐 휴대폰을 다시 저 멀리 던져두었다. 이런 건 정말 너무 싫어. 날씨가 좋긴 개뿔, 오늘 비 온댔는데. 바보, 멍청이, 정은비.
유나의 답장은 30초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 그래 그러자
항상 둘이 함께 가는 그 카페에는 아직 유나는 오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창가,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 자리잡은 은비는 오랜만에 꺼내 입은 원피스가 구겨지지는 않았는지, 혹시 눈썹이 잘못 그려지지는 않았는지, 입술 색이 번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지난번 예린 언니와 밥을 먹었을 때 예쁘다고 온갖 칭찬을 들은 그대로 하고 나왔는데도 불안했다.
“언니 저 진짜 예뻐요?”
“내가 오늘 한 천 번 정도 말하지 않았어? 너 예쁘다고.”
“그럼 오늘 입고 나온 대로 유나 만나러 가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거야 뭐.. 그런데 아직 그대로야?”
“뭐가요?”
“아니다, 됐다. 너네 이상한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말끝에 길게 달라붙은 예린의 한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아는 척도, 모르는 척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은비는 그저 웃어버렸다. 10년을 넘도록 친구라는 이름으로 얽힌 최유나와 정은비의 관계는 그 어떤 금속보다 단단하면서도 때로는 종이 한 장보다도 약하다는 걸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으니까.
10년 전 그날, 동네 친구가 생겼다고 환하게 웃는 유나의 얼굴을 보지만 않았더라면 인생이 좀 더 단순하고 평온했을 텐데. 복잡하고 어려운 건 질색인 은비에게 최유나는 인내심의 한계이자 감정의 극한(極限)이었다. 정말이지, 다시 그날로 돌아가면 그 손을 잡나 봐라, 내가. 중생대 퇴적층에 모래 한 알을 더하는 것보다 부질없는 다짐을 곱씹던 은비는 저 멀리 뛰어오는 유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미안, 늦었지.”
“또, 또 뛰어오고 그러지. 너 아직 뛰어다니면 안 된댔잖아.”
“이제 이 정도는 괜찮아.”
“재활 다 끝났어?”
“응, 다음주부터 복귀 프로그램 하나씩 하면 된대.”
어떻게 지냈냐거나, 뭘 마시겠냐는 질문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하루 1시간이라도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면 전화를 하거나 하는 일상 속에서 누가 어떤 걸 마시고 싶어할지 정도는 잘 알고 있으니까. 은비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차가운 녹차를 한두 모금 만에 벌컥벌컥 삼키는 유나의 등짝을 때렸다.
“아, 아파.”
“너 그렇게 먹다가 사레 들린다니까. 좀 천천히 마셔.”
“더운데..”
“한 잔 더 시켜줄까?”
“그래도 돼?”
“그 대신, 휴대폰.”
의아한 듯 물음표를 띄우던 것도 잠시, 유나는 순순히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970530, 6자리의 비밀번호로 잠금화면이 풀렸다. 언제나 그렇듯 연락처와 메신저에는 가족, 몇몇 친구, 광고 및 정보성 알림, 그리고 은비가 전부였다. 아무 프로필 사진도, 배경화면도 없는 최유나다운 휴대폰. 은비는 언젠가부터 시작된 휴대폰 검사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유나가 좋으면서도 미웠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왜 이러고 싶어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구는 최유나.
“너는 내 휴대폰 안 봐?”
“봐야 되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무슨 일 생기면 은비 네가 먼저 얘기해주겠지. 아니야?”
그 말을 하는 유나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유나가 말하는 ‘무슨 일’이라는 것에 다른 사람을 만나서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입을 맞추고 안는 것도 포함되는 걸까. 가끔 은비는 투명하고 까만 유나의 눈에서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그런 게 자꾸 나를 힘들게 한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건 저 눈을 아예 보지 못하게 될까 봐. 무언의 말다툼 속에서 은비는 먼저 웃어버렸다.
“당연하지. 우리 엄마보다 네가 더 날 잘 알걸?”
“너도 그래.”
“하긴, 우리가 벌써 몇 년 친군데.”
“그땐 네가 나보다 키 컸는데.”
“뭐?”
“아니, 그냥 그렇다고..”
“너 엄청 맞고 다녀서 내가 데리고 다닌 거 기억 안 나? 순해가지고 누가 때려도 웃고 다니기나 하고. 하여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엄청 신경 쓰이게 만드는 재주 있어, 최유나.”
그런가, 하고 그저 미소만 짓고 있는 유나는 어릴 적 웃던 모습 그대로 같다가 창 밖을 내다보는 옆선은 날렵한 사냥개 같았다. 사실 이제는 유나의 목소리도, 선도, 확연히 어른의 그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우정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기에는 어디론가 훌쩍 큰 걸음으로 가버릴까 봐 애타는 건 나 혼자인지, 은비는 가끔 아득해졌다.
“재활 끝나면 올해 전지훈련에 따라가도 된대.”
“정말?”
“응. 내년부터는 레귤러로 뛸 수 있다나 봐.”
“진짜 잘 됐다! 그럼 이제 네 이름 박힌 유니폼 입고 경기 구경 가도 되는 거야?”
“응 그런데..”
“…?”
“전지훈련 가면 한 달 동안 너 못 봐.”
“바보야, 지금 그게 중요해? 난 또 너 아프다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한참을 뜸을 들이던 유나가 다시 무릎이 아프다고 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안도의 한숨을 쉰 은비는 유나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바보 같은 최유나는 아프다고 울상을 지으면서도 하나도 막지 않고 다 맞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또 천방지축 강아지 같던 최유나 그대로였다. 모두 듬직하고 어른스럽다고 칭찬해 마지 않는 유나의 이런 모습을 아는 건 은비 뿐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억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비 오는 날 신나서 뛰어가다가 웅덩이에 빠져서 새 옷 다 버린 유나 안 혼나게 해주려고 같이 웅덩이에 빠졌던 거나, 부모님 몰래 노래대회에 나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겨우겨우 체험학습을 만들어 내 데리고 갔던 것, 야구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막차가 끊길 때까지 연락도 없이 배팅장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있어서 유나네 부모님과 온 동네를 뒤지고 다니던 것 등등 최유나와 관련된 기억은 온통 총천연색이었다.
“은비야.”
“응?”
“무슨 생각해?”
옛날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는 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인지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눈빛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얼음이 다 녹아버린 아이스라떼를 한 모금 삼켰다. 지금 심장이 뛰는 건 다 카페인 탓이다.
“무, 무슨 생각하기는. 졸려서 멍 때린 거지.”
“졸려? 그럼 가자, 이제. 나 곧 재활 가야 하니까 너 데려다 주고 갈게.”
“재활 끝나면 뭐 하는데?”
“한강 가서 슬슬 뛰어보려고.”
“…그래, 가자.”
두 사람은 카페에서 나와 함께 걸었다. 분명 어제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온다더니 구름과 구름 사이 햇빛이 쨍쨍하기만 했다. 우산을 드는 척 더 붙어 있을 수 있는 기회 같은 건 없었다. 그런 아쉬움은 하나도 모른 채 오늘 같은 날씨는 뛰기 좋다며 약간 들떠 있는 유나를 보며 은비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웃었다.
“바보야, 조심하기나 해. 다시 다치면 한 달이 뭐야, 두세 달 나 못 볼 줄 알아.”
“진짜?”
“응, 진짜.”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해진 유나의 얼굴에 괜한 말을 했나 싶었지만, 은비의 진심이었다. 두세 달 못 보는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다치지 않았으면. 너에게 항상 좋은 일만 있었으면. 그리고 언제나 함께였으면. 마음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겠지만.
“은비야.”
“왜.”
“있잖아.”
“응?”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
“…아니야, 아무것도.”
“뭐야, 뜸들이기나 하고.”
“집 다 왔다. 얼른 들어가.”
“응, 너도. 운동 끝나고 연락해!”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실 은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유나가 오늘도 말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은비가 멀어지는 유나의 뒷모습을 달려가서 안아주지 못하고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이유와 같은 거라는 것도.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기다리면 그만큼 더 완벽하게 다가와줄까? 사실은 단 한 마디면 충분하다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는데.
너의 휴대폰이 나로 가득하기를
우리가 좀 더 다정하게 부를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나에게 하고 싶은 너의 그 말이
세 글자, 한 마디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