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정은비는 정확히 1시간 13분째 화가 나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스치기만 해도 초콜릿 향이 코끝에 맴돌 정도로 꾸덕하게 구운 퐁당 쇼콜라(Fondant au Chocolat)가 식어빠질 때까지 다 먹어 치우지 않고 팔짱을 풀지 않은 채 휴대폰 화면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면 그건 은비가 화가 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때 아닌 오뉴월의 서릿발 내리는 살얼음판 분위기에 괜히 앞에 앉은 친구들까지도 각자 커피만 쪽쪽 빨아먹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참다 못해 방금 전에 만들어진 은비 없는 메신저 방에서는 조용히 숫자가 없어지며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 야, 정은비 왜 저래
- 뻔하지 뭐 쟤가 저러는 이유는
- 유나?
- ㅇㅇ
- 아씨 왜 또
- 요즘 맨날 저래
“아 열받아.”
“왜?”
“최유나 이거 거의 나 보라고 이러는 거지?”
씩씩거리며 은비가 내민 휴대폰 화면에는 유나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둥둥 떠 있었다. 최유나가 누구냐 하면, 정은비의 대학 동기이자 과대, 모두가 좋아하는 선배이자 동기이자 후배였다. 아, 이걸 빠뜨리면 안 되지. 새터 첫 날부터 지금까지 은비와 2년 반을 붙어다녔지만 지금껏 돌려받은 거라곤 정은비 연애 통보 뿐인, 비운의 주인공 최유나.
하지만 정작 피해자인 유나의 인스타그램은 평온했다. 새벽까지 공부한 게 분명한, 전공책 더미 위로 잠들어 있는 수려한 얼굴, 한강 가서 탄 자전거, 밤에 조깅하러 나가서 찍은 셀카, 그리고 노을 아래 길게 늘어선 그림자.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최유나다운 사진들과 스스로 채찍질하고 다짐하는 짧은 글귀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친구들은 은비가 열 받은 포인트를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이게 왜? 뭐가 어때서? 물음표만 가득한 친구들의 표정을 보고 은비가 속이 타는 듯 이제는 물인지 커피인지 모를 그 사이 어딘가의 액체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눈치 없는 친구 하나가 입을 열고야 말았다.
“유나 진짜 운동 열심히 하더라. 저번에 보니까 팔에 근육..”
“뭐라고?”
“어?”
“네가 최유나를 왜 봐.”
“아니.. 내가 일부러 본 게 아니라…”
“뭐야, 너네도 다 최유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고 그러는 거야? 말해봐.”
방금 네가 보여줬잖아!! 모두 억울함이 가득한 눈빛을 교환했지만 누구도 용감하게 은비에게 그런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은비가 작은 주먹으로 커다란 카페 테이블을 탕탕 치는 걸 보아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게 옳았다.
“이거, 누가 봐도 여자친구가 찍어준 거 맞지? 아주 신났네, 신났어. 이 세상에서 지만 연애하는 줄 알아? 그리고 이거 혼자 찍은 척하는데, 옆에 그림자 보여? 백퍼 누구랑 같이 간 거잖아. 하, 이제는 자기 인기 떨어질까 봐 연애 안 하는 척까지 해? 최유나 이 배신자! 기만자!”
어쩐 일로 조곤조곤하게 말을 시작하나 했더니 결국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으로 끝나고야 말았다. 은비의 친구들은 카페 안에 앉은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하자 그만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꼭 이런 타이밍에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은비의 휴대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누군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은비가 전화를 받는 순간, 이미 그 이름 세 글자를 본 친구들은 조용히 몰래 가방을 챙겼다. 도망가기 10초 전, 9초, 8초...
“여보세요?”
“어, 은비? 내 전화 받네?”
“…너 설마.”
“오랜만에 전화해서 미안한데, 나 넷플릭스 비밀번호 좀,”
“너 내가 나한테 다시 전화하면 죽여버린댔지!!!”
은비의 화가 난 목소리는 이제 카페 밖까지 울려 퍼졌다. 학관 앞을 지나다니던 수많은 커플과 커플이 아닌 사람들 모두 토끼 같이 생긴 한 여자가 씩씩거리고 있다는 걸 알 정도로. 이제는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는 전 남자친구의 전화를,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받아야 하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은비는 분통이 터졌다.
아, 빡쳐. 짜증나. 다 거지 같아!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새끼를 만난 것부터가 문제였다. 일주일 밤낮으로 쫓아다니는 게 불쌍해서 사귀어주지 말았어야 했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사귄 지 1주일 만에 입만 열면 넷플릭스, 왓챠, 멜론 비밀번호를 구걸한 것도 모자라 배달 앱으로 야식 좀 사달라고 조르던 날 말 그대로 정강이를 구둣발로 까버리게 만든 놈. 눈 높다고 정평이 났던 정은비의 연애사 중 유일하게 도려내고 싶은 흑역사. 하필 그놈이 대학에 와서 처음 사귄 남자친구라는 사실까지 생각이 난 은비는 학점이고 뭐고 지금 당장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 순간, 은비는 하나 둘 도망가고 없는 친구들 틈에서 저 멀리 방긋방긋 웃는 최유나의 얼굴을 발견했다. 유나도 비싼 등록금 내고 다니는 대학생이니까 학관 앞 카페에 등장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은비의 눈에 띄는 건 문제였다.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환하게 웃는 최유나를 보자 다시 혈압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야, 최유나!”
“응?”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실실 웃어?”
“내가 뭘?”
“좋냐?”
“좋지. 오늘 날씨 완전 좋은데?”
“아주 나 연애해요,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지 그래?”
“뭐야, 난 또 뭐라고.. 잘 쉬고 내일 보자!”
어이가 없었다. 예전 같으면 은비를 발견하면 저 멀리서부터 쪼르르 달려와 1분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으려고 했을 최유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주말 내내 연락 하나 없다가 며칠 만에 만나는 건데, 유나는 은비의 시비에도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가던 길을 가버릴 뿐이었다. 키도 커다래서 사람들 틈으로 동그란 유나의 뒷통수가 계속 눈에 보이자 은비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애꿎은 종이 유인물을 와르르 구겨버렸다.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도대체 왜 그래?”
“최유나 연애하고 나서부터 너무 재수 없어!”
“최유나가 먼저 너 좋아했다며? 네가 유나 차고 다른 사람이랑 사귀어 놓고…”
“쟤가 다른 애랑 사귈지 몰랐지!”
“유나 오늘 저녁에 뭐 있는 것 같던데.”
“뭐?”
“정 그렇게 신경 쓰이면 연락해 봐.”
“내가? 전혀, 1도, 하나도 신경 안 쓰이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친구들의 모습은 은비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요즘은 그저, 어떻게 하면 저 짜증나는 최유나의 연애를 망쳐버릴 수 있을까, 그런 고민으로 하루가 바빴다. 대체, 오늘 저녁엔 뭘 하고 다니는 건데?
전 남친이 고백을 해 왔을 때, 은비는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 등장한 새로운 사람이 얼마나 심심하고 지루한 이 대학 생활을 재미 있게 해줄지, 그게 은비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어차피 유나는 항상 옆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전 남친과 사귄 지 하루 만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고 비싼 옷을 입고 와 멋있는 척을 해도 재미있기는커녕 1분 1초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바보 같은 최유나랑 있을 땐 뭘 해도 재미 있었는데. 맨날 공부한다고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녀서 그렇지 몸도 탄탄해서 뭘 입고 나와도 좋았는데.
그제서야 알았다. 사실은 유나랑 있는 게, 유나가 좋았다는 것을. 항상 다정하게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를 들어주고 말하지 않아도 은비의 기분이 어떤지 알아주던 유나가 소중했다는 것을. 이렇게 최유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이 변해서 다른 여자들에게도 해사하게 웃어줄 줄 알았으면 1주일이고 하루고 다른 사람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씨잉
은비는 발을 굴러 애꿎은 땅바닥을 찼다. 손에 쥔 맥주 캔은 반도 비우지 못해 찰랑거렸다. 애초에 술이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길을 걷고 싶어서 나온 산책길이었다. 은비와 유나의 자취방 사이, 놀이터와 가로등이 있는 골목. 유나가 은비를 매일 집으로 데려다 주던 길을 이제는 혼자 걷고 있었다. 지금 여기에 있다고 연락을 해볼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을 유나에게 이렇게 혼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느니 자퇴를 하는 게 나았다.
같이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시험 공부하기 싫다, 그 교수 눈빛이 이상하다, 얘기하다가 영화 보러 갈래? 하고 예정에도 없던 심야 영화를 보러 가던 그네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최유나는 옆에 없었다. 그네의 삐걱거리는 소리에 이 현실이 차갑게 와 닿았다. 겨우 1주일 다른 사람 사귀었다고 이렇게 혼자 내버려두다니, 최유나가 나빠. 은비는 갑자기 서러워졌다.
야 최유나 이 멍청아! 나 좋다며! 너무 좋아서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고백도 못했다며! 바보, 멍청이, 누가 그렇게 쉽게 마음 바뀌래? 어이 없어 진짜. 나 같은 애가 또 어디 있는 줄 알아? 나처럼, 어? 귀엽고, 밥 잘 먹고, 예쁘고, 너 칠칠 맞게 뭐 흘리고 다니는 거 챙겨주고, 최유나 밀가루 안 먹고 운동에 환장한 거 다 받아줄 사람 없다?
“응, 없긴 없더라.”
“…!!”
은비는 너무 놀라서 가만히 멈춰 있는 그네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최유나가, 여기 서 있을 리 없는 최유나가 다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가로등 불빛에 길게 늘어선 그림자가 너무나도 익숙했다.
“야, 너, 너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나는 최유나고, 집 가고 있는데 자꾸 귀가 간지러워서 와봤더니 네가 내 얘기 하고 있던데.”
“하나도 재미 없거든?”
쏘아대는 은비의 말투에도 유나는 그저 빙글빙글 웃으며 비어 있던 옆 그네에 걸터앉았다. 다리 되게 기네. 예전에도 느꼈지만 같은 그네에 앉아도 유나의 발이 은비의 발보다 한 뼘 넘게 멀리까지 뻗는 게 싫으면서도 좋았다. 조금은 찬 것 같던 저녁 공기도 어느새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저 멀리 큰 도로와 건물의 분주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놀이터에 이따금 삐걱거리는 그네 소리만 번졌다. 은비는 자꾸 세게 뛰는 맥박 때문에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아서 심호흡을 했다.
“저녁에 뭐 있다더니..”
“이제 내 일정도 챙겨주는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
“소개팅 나갔어.”
“너, 연애 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나 연애한다고 한 적 없는데.”
“그럼 그 동안 같이 다녔던 애들은 뭔데?”
“네 말대로 이것저것 바꿔봤더니 나 좋다는 애들 많더라.”
소개팅, 수도 없이 들어왔던 그 단어 하나에 이렇게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 줄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얘기를 하는 최유나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심장이 어디 있는지 느껴질 정도로 아팠다. 이런 게 아프다는 거구나. 은비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그넷줄을 꽉 붙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소개팅은 어떻게 됐는데?”
“다 똑같지, 뭐. 밥 먹고, 얘기하고.”
맞는 말이었다. 모두가 그러하듯 유나도 서로 이름을 말하고,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지, 좋아하는 이상형은 어떻게 되는지 이야기를 하다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을 것이다. 은비도 수십, 수백 번 보고 들어온 이야기였다. 하지만 최유나가, 다른 여자와 소개팅을 했다는 생각을 하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꾸 바보 같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 척 했다. 그런 은비를 가만히 지켜보던 유나가 한숨을 쉬었다.
“은비야.”
“…”
“정은비.”
“왜.”
“나한테 할 말 없어?”
“…”
“나 이 사람이랑 사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왜냐면,”
은비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유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은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나 이 사람이랑 사귀기로 했어. 그렇게 통보하듯 얘기하던 날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던 유나가 생각났다. 그래, 은비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때도 지금도 한결 같은 다정한 말투였다. 그 다정함이 변할까 봐, 이제 더 이상 나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미안해, 네 마음 다 알면서 다른 사람 만나서.”
“괜찮아, 너도 좋아서 사귄 거 아니잖아.”
“다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은비 너도 나 좋아하잖아.”
“막상 너랑 사귀면, 나한테 실망해서 안 좋아하게 될 수도 있잖아. 사귀었다가 헤어지면 너 다시 못 보잖아. 그게 너무 무서웠어.”
“나 어디 안 가. 믿어도 돼. 그러니까 너도 도망가지 마.”
정은비 술 냄새 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나는 이제는 거의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은비를 안아 달랬다. 눈이 빨갛게 부었을 얼굴을 보이기 싫어 품 안으로 파고 들어도 자꾸만 눈을 마주쳤다. 결국 웃음을 터뜨리는 유나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리고야 말았다.
“바보야, 보지 마. 나 울어서 못 생겼어.”
“아닌데? 오늘도 엄청 예쁜데?”
“…너 진짜 짜증나.”
“난 너 좋은데.”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워 오는 걸까. 다른 사람이 했으면 느끼하다고 등짝을 때려주었을 텐데. 은비는 퉁퉁 부은 눈으로 유나를 흘겨 보았다. 그 와중에 자꾸 웃는 얼굴이 좋아서 짜증이 났다. 망했어. 망했다구. 이렇게 다시 연애를 시작할 생각은 없었는데.
“다 울었어?”
“응.”
“가자, 데려다 줄게.”
아마도, 어쩌면, 이날만을 기다려 왔던 걸지도.